최근 교회 안 남자 청년들이 유약하고 소심해서 문제라는 얘길 연거푸 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한 그럴 듯한 원인분석과 함께요. 소심한 형제들, 분연히 일어나 대시를 하고 여친을 쟁취하라는 격려와 애정 어린 조언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자든 남자든 소심할 수 있는데 남자는 굳이 그 소심함을 떨쳐내야 하는 건가요? 떨쳐낼 수 있기는 한 걸까요? 남자다워져라, 강해져라, 리더십을 키워라 하는 공격적 조언이 안 그래도 소심한 남자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천방지축 활달한 여자에게 조신해져라, 여자답게 행동해라해서 될 일이 아닌 것 처럼요.

 

미국의 정신과 의사 진 시노다 볼린(Jean Shinoda Bolen)은 가부장제 문화가 여성에게만 순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어떤 방식의 순응을 요구한다며 이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비유합니다. 아테네에 들른 나그네들은 이 침대에 눕혀져서 침대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잡아 늘여졌고 큰 사람은 침대 크기에 맞게 잘렸다고 합니다. 가부장제 문화라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맞는 표준남성은 성공하는 데서 안락함과 기쁨을 찾는답니다. 성공을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성공이란 눈에 보이는 그럴 듯한 성과 아니겠습니까. 남성의 힘과 능력을 입증해보일 수 있는 좋은 직장, 높은 연봉 같을 것들 말이죠. 녹록한 일은 아닙니다. 사회적 성공이라는 그럴듯한 자리에 가기 위해 나의 일부를 잘라내고 내게 없는 걸 가져다 붙여야 하는 작업이 고될 뿐 아니라, 맞춘다고 애를 써봐야 정작 차지할 수 있는 침대는 몇 개 되지도 않아 운도 따라줘야 하는 것 같아요. 때문에 가부장제 문화에 순응해 사는 것은 여성 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불행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유독 유약해 보이는 형제들이 많은 것은 어떤 이유로든 이 침대에서 내려온 이들이 많이 모여 있기 때문 아닐까요? 시대의 표준 침대와 예수님의 가르침이 상충하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성공한 남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슬렀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만큼 많은 것을 잃었을 거라는 것이죠. 물론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만이 능사도 아닙니다. 어째 됐든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표준에 꿰맞춰 살 뜻이 없는(또는 처음부터 기회조차 얻지 못한) 남자들, 젊은 형제들을 남자답지 못한 유약한 사람들로 쉽게 재단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친이 지고 있는 남자답기 위한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먹고 살기위해서 불행한 직장생활을 이어가는 것도 안 됐는데 먹여 살리기 위해해야 하는 일은 어떨까요. 결혼한 남자에게는 현재형의 짐일 것이고, 결혼 전 남자는 미래형의 짐을 지기 위해서 영어공부, 자격증 공부 등에 매진하며 가장의 침대에 맞는 몸을 만들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라 하지 않아도 어릴 적부터 남자는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달려갑니다. 무엇보다 번듯한 직장이 있어야 소개팅이라도 하고, 전세 얻을 돈이 있어야 프러포즈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누군가를 좋아하여 연애하고 결혼을 꿈꾸게 된 남자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먹여 살리지?’라는 질문으로 미래 가장으로서의 짐을 미리 지고 시작하는 거죠. 오빠가 처음 사귈 땐 안 그랬는데 갈수록 무심해져요. 처음엔 매일 만났는데 갈수록 데이트 횟수가 줄어들고요. 게다가 만난다 해도 피곤해를 입에 달고 있으니 데이트를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저보다 일을 더 중요한가 봐요. 이런 섭섭함을 유발하는 진원지는 여기! 그러니 이 피곤한 오빠 어깨 위의 돌덩이를 한 번 쯤 주목해줘 보세요. 사랑하니까 빨리 취업해야지, 사랑하니까 어서 돈을 모아야 해, 하면 달려야 할 수 밖에 없는 남자사람을요.

 

남자다움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올라가면 잘라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감정입니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기능 말이죠. 심리학적 상식이 보편화 되어 사내 녀석이 우는 것 아냐!’ 하는 말은 많이 사라졌지만 섬세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여전히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치부됩니다. 감정을 느끼는 법조차 모르는 것 같습니다. 관계맺음, 특히 애정관계에서 정서적인 소통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자사람이든 여자사람이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정당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거의 행복의 능력과 직결됩니다. 때문에 아무리 늦었어도 배워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남자답기 위해서, 아니 의식조차 없었지만 어쩌다보니 감정이라는 것을 배제하고 살아왔던 남자사람이라면 연애와 결혼은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 다른 섬세한 감정의 결을 가진 여친(아내)를 관찰하고 이해하며, 그녀의 요구에 반응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잘라버리고 없는 줄 알았던 느끼는 능력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느낌을 배워가는 어느 날, 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돌덩이의 무게를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돌덩이로 인하여 과하게 위축되고 필요 이상으로 소심해졌던 스스로를 발견할 때, ,그때 아마도 진정한 힘이 어깨에 빡 들어가지 싶습니다.

 

월간 <QTzine> 2015. 7 월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