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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SS 영혼의 친구

남편을 위한 어머니 생신상

larinari 2012.02.26 00:59




알고 있는 요리를 하든,
요리책을 찾아서 하든,
어디서 한 번 먹어보고 하든,
생전 처음 듣도 보도 못한 요리를 만들어보든....
닥치고 요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냄이다. 라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오늘 저녁 무렵까지 거실에는 저런 풍경이었다.
상이 깔리고 상보가 덮이고 '자 이제 채우보라구!' 하면서 떡 버티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막막했다. 저녁 6시 까지 뭔가를 먹게 해놓아야 한다! 미션, 미션 파써플!!






몇 해 전 내 생일에 어머니께서 안마기를 선물로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더랬다.

'에미 선물이고 애비 피곤하고 근육이 뭉치고 그럴 때 하라고 해라'
일정 정도 섭섭하고 한편 이해도 되는 선물과 선물의 변에 대해서 웃었던 기억이 있다.


오늘 어머니 생신을 집에서 차려드렸다.

생각해보면 그 때 어머님 말씀을 그대로 돌려치기 해도 좋으리라.
'어머니, 어머니 생신상이구요.... 애비를 위해서 준비했어요'
텅 비어 식탁보만 깔린 허전한 상처럼 내 마음도 그랬다.
10년 넘는 결혼생활 동안 내게 '사랑'을 새로 가르쳐준 시어머니와의 관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시어머니께 드릴 것이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드릴 사랑이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드린 사랑이 많다는 자부심만 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요즘에는 마음이 텅 비어버렸다.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그 간의 내 행적도 알아주고 말할 수 없이 고마워했던 남편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프고 짠했다. 텅 비어버린 내 마음에 섭섭해할 만도 한데
'당신이 그 동안 내 몫 까지 다 하느라 애썼지. 당신한테만 맡겨놓고 난 부모님께 너무 무심했지. 내가 잘 할께. 당신은 마음으로 자유롭게 해'
이러는 남편을 위해서 어머니 생신상을 차렸다.


검은 비닐봉지에, 스치로플 팩에, 여기 저기 담겨진 야채와 재료들이 어느 새 먹을 수 있는 모양을 갖춰가는 게 신기하다. 바로 내 손이 닿아 그렇게 되다니 과연 마이더스의 손이 아니던가.
접시에 처음 담기는 것들은 밋밋하다. 그저 두부일 뿐이고, 그저 볶아놓은 버섯일 뿐이다.







식사시간이 임박해오면 밋밋하던 접시들에 소스가 얹어지고 짝을 이루는 재료들이 더해져 색과 맛의 조화로움이 생긴다. 그렇게 음식에도 생기가 돈다.
오래 끓인 미역국이 뽀얗게 진국으로 우러나고,
무르익은 고기가 후두두두 먹기 좋게 부서진다.


불과 서너 시간 만에 빈 접시에 생기 나는 음식이 놓여지고,
상이 차려져 풍성해지는 것처럼 마음의 길도 그랬으면 좋겠다.

손목이 아프도록 재료을 씻고 썰고 준비하고 익히기만 하면 금새 풍성함을 채워져 내 사람들과 나눌 것이 넉넉해졌음 좋겠다. 허나, 마음의 길은 그러하지가 않다.





맛있게 식사를 하셨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님은 다잡아 먹은 내 마음에 다시 한 번 생채기를 내고 가셨다. 아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애써 생일상 차린 사랑하는 막내 며느리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신 적이 없으시다. 어머님은 그런 삶을 살지를 않으셨다.
내 안에 부딪혀 올라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부유물들이 내 자신에게 상처를 냈다. 아니다. 상처 준 사람 없이 받은 사람만 있을 수 있나? 나 역시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
모르겠다. 요리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는 지는 몰라도  결혼 13년 차 며느리 나는 오늘 마음의 잔치에서는 아무것도 요리해내질 못한 것 같다.


그래도 필요 이상의 자책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음식은 한 번 해서 먹어치우면 끝이지만, 기껏해야 '그 날 그거 맛있었어'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주면 최고지만 마음의 길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길은 느리고 길어서 단 번에 해치울 수 일이 아니니까.





다른 어떤 날보다 기도가 하고 싶어진다.

어머니와,
어머니와 나를 동시에 사랑하는 남편과,
나와 동병상련의 또 다른 며느리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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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Comments
  • 프로필사진 BlogIcon 신의피리 2012.02.26 10:00 신고 지난 13년간 당신이 한 시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다른 사람의 30년보다 훨씬 더 진실하고 더 헌신적이었지. 지금의 아픔 또한 사랑의 또다른 이름이라 생각해.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몸무림치는 우리 모두를 당신의 섭리 가운데 당신의 뜻을 성취하도록 이끄시리라 믿어. 이제 당신의 바통을 내가 받았으니까, 이젠 내가 힘차게 달릴 때야. 당신은 좀 쉬어.
  • 프로필사진 larinari 2012.02.26 13:26 대학 4년 내내 친구들한테
    '넌 유아교육과 맞냐? 여성학과나 사회학과 아냐?' 하는 소릴 듣고 다녔어.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시험을 친 적도 있고...
    결혼하고 시댁과의 관계에서 며느리로 겪는 불합리한 일상을 마주하면서 내가 투사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당신이 처음부터 아프지만 부모님과의 독립을 잘해준 탓이었구나. 싶어.
    나도 자라고, 내 안의 사랑도 자라가는 과정이라는 건 막연히 믿고 있어. 고마워.
  • 프로필사진 duddo 2012.02.26 16:52 왠지 이 포스팅엔 좋아요 누르고 조용히 사라져줘야할것 같은데...
    갑자기 좋아요가 그립네요 ㅋㅋ
    절제된 듯한 글속에서 두분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며 부러워하다 사라집니다...ㅎㅎㅎ
  • 프로필사진 larinari 2012.02.26 17:14 블로그에도 좋아요 기능 있었으며 좋겠어.
    페북 탈퇴하고 제일 그리운 건 '좋아요'!ㅎㅎㅎ
    우리 사랑이 고로코롬 뜨거워 보이냐?
    보는 눈이 있네.ㅋㅋㅋ
  • 프로필사진 myjay 2012.02.27 08:12 좋아요.꾹!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2.02.27 08:34 신고 댓글 좋아요 ☞1
  • 프로필사진 이과장 2012.02.29 16:04 고모 페북 탈퇴하셨구나..
    어쩐지 요새 고모 글이 없더라니..
    전 탈퇴는 안했고 들어가서 지인들 소식만 접하거든요.

    고모네 거실 첫번째 사진.. 한정식집인 줄 알았다는 ㅎ
    고모 포스팅을 보면서 고모마음을 알아주는 고모부가 계셔서 부럽고,
    한편 고모부의 그러한 이해도 고모가 진심으로 해서 그런 것 같아 제 자신이 부끄럽고, 여러가지 마음이 오락가락...

    3주전쯤 성은이 안아주다가 허리 다치신 어머님께서 부쩍 예민해지셔서 살얼음판을 걷는 요즘인데...
    나름대로 어머님 수고를 덜어드리려고 야근후에도 새벽까지 국끓이고 반찬하고 성은이 하루를 위해 챙기려고 애쓰는데,
    어머님도 아닌 박서방이 '더 잘해야지.. 이걸로 부족해.. 이정도 하고 힘들다고 하냐.. 엄마는 성은이 보시다가 다쳤는데..'라며 마음에 짐을 더 올려놓네요.

    내 자아를 위해서가 첫번째 이유지만, 그래도 경제적인 이유도 큰데..
    그리고 성은이 봐주시기 전에 혼자 안식하신다고 하셔서 임신한 몸으로 직장다니면서도 아버님 모셨고 출산후에 몸조리도 못한채 아버님이랑 도련님 새벽밥 차렸는데.. 그런 수고는 아무도 기억은 커녕 원래 당연한 것으로 여겨 오래전에 잊혀졌고, 아이를 직접 못키우는 게 내 잘못인냥 죄인으로 대하는 것 같아 참 힘든 날들이에요. 아버님까지 허리 다치셔서 아주 그냥 제대로 눈칫밥 먹고 있네요.

    나중에 정작 그렇게 되면 또 마음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사실.. 지금 마음으로는.. 남편만 내 맘 알아줘도 성은이 봐주시느라 애쓰시는 두분을 위해 더 기쁜 마음으로 섬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박서방 참 어리석어요 ㅠ.ㅠ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2.02.29 18:58 신고 그러게 말이다.
    시부모님이야 한 다리 건너시고...
    우리 지희 꼼수 안부리고 정말 애쓰는데 그걸 어찌 몰라줄까. ㅠㅠ
    진심은 시간이 보여주기도 해.
    그리고 이런 저런 마음이 얽혀 있어서 당장 인정은 못해도 마음 밑바닥에선 지희 진심을 알고 있을 것이고.
    우리 지희 힘내라. 고모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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