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신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멀리는 고3때, 가깝게는 채윤이를 낳고도 결심했던 일이다.

결혼 전, 어느 여름 날.
남편은 장신대 도서관에서 신대원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대학원 공부 중이었고 여름방학 때라서 같이 옆에서 같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느닷없이 기윤실에서 '와서 간사로 일해보지 않겠냐?'하는 제의가 있었고,
'밥벌이를 할 수 있어야 결혼을 시켜주지'하시는 부모님 말씀과 더불어 마지못해 신학도인 자신을 받아들이는 나를 염두에 두고 남편은 과감히 책가방을 쌌다. 기윤실로 가기로 결심하고 장신대 도서관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내 손을 잡고 나왔었다.

다시 남편은 신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남편의 의지가 강하다. 웬만한 일에 남편이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결심은 내가 웬만큼 방해공작을 해도 별 수 없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다. 반대할 수도 없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처음엔 마음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지금, 평신도로 교회 공동체를 섬기고 내 일을 하는 지금이 너무 행복한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모'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목사의 아내 즉, 사모'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편이 드디어 자신의 소명을 향해서 주도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있었던 사경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듯 했다.'너도 잘 알고 있지 않니? 네 남편의 소명을 니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니? 이제 그만 놓아라. 그만 붙들고 있으라니까'
결국 기쁨으로 남편을 지지해야지 결심했다. 그러나 내 맘에는 평안이 없었다. 슬프고 괴로왔다.
기도했다. '하나님! 남편의 소명이라는 것 알겠어요. 남편이 사람들의 영적이 성장을 도우려할 때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가 넘치고 아이디어가 많은 것 알겠어요.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제 마음에 평강으로 응답에 주세요. 제 마음에 평안이 없어요'

어느 주일 아침 예배에서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내가 부모로서 아직 세 살, 여섯 살 밖에 안 된 채윤이와 현승이의 독특한 성품을 이해하려 하고, 달란트를 발견하려 애쓰고 있다. 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언젠가는 찾아야 할 것이고 그 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정말 행복하게 사는 것을 돕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하물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전혀 엉뚱한 곳으로 부르시겠나. 내 성품도 무시하고 내 달란트도 무시하고 살아야 하는 자리로 나를 부르시겠나? 혹시 남편이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면 내가 지휘를 못하거나, 목녀로서 섬기지 못할 수도 있고, 교회 홈피에 자유롭게 글을 쓰는 일들을 못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뭐 내 정체성의 전부인가? 내가 알지 못하는 보다 행복한 사역의 자리로 날 부르실 하나님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는 생각의 전환으로 이끄셨다. 그렇게 생각이 바뀌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내 '생각의 틀'을 바꿔주신 것 같았다. 또 굳이 남편 때문이 아니라 내가 현재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일과 사람들이 하나님께로서 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졌다.
홍순관의 노래에 '님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새의 날개처럼 자유로운 것'이라는 나레이션이 있는데 그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전히 우리 부부는 이 문제를 놓고 서로의 생각을 조율중이고, 대화중이고, 기도중이다. 이 일로 남편이 자신의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 자신의 문제에 직면하는 계기가 된 것도 감사하다. 물론 이 과정은 남편 자신에게나 내게나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남편의 소명과 꿈을 소중히, 정말 소중히 여기면서 이 어려운 시기를 함.께. 통과해 나갈 것이다.

2005/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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