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주일 간은 턱이 아파서 죽 2인분으로 이틀을 때우는 식으로 식사를 하고,
한 며칠은 사골국이 생겨 거기 말아서 후루룩 마시는 것으로 연명하다가,
턱은 나졌지만 몸에 에너지가 없어서 요리의 신이 도통 강림하시질 않아서 용가리 치킨 한 봉지를
거의 매끼마다 먹여서 일주일만에 다 털어 버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금요일에 남편이 올라왔습니다. 남편이 이번 주 설교실습이 있어서 피를 말린 것 같고,
개학하고 2키로나 빠졌다는 말에 바로 요리의 신이 오시더만요.
언젠가 트럭에서 튼실한 냉동낙지 한 봉지를 6000원에 팔길래 냉동실에 얼려 놓았었죠.
그걸 꺼내서 철판낙지 볶음 맛있게 해서 금요일 저녁을 먹었습니다.
예정됐던 목장모임이 취소된 토요일 저녁.
저녁 준비하기 힘들어 하는 걸 눈치 챈 도사님이 '기냥 뭐 시켜먹자'고 하는데 나도 먹어야겠고,
애들도 먹여야겠고해서 빗 속을 뚫고 두메촌까지 걸어가 고기를 사다가 보쌈을 했지요.
수퍼에 갔더니 절인 배추까지 팔고 있어서 무채김치 만들고 콩나물 국까지 끓여서 제대로 '배달 온 보쌈' 필을 냈습니다.
금요일도 토요일도 도사님은 일주일의 피로가 몰려오시는 관계로 오후 낮잠을 주무셨는데요.
저녁 식사 준비를 해놓고 '일어나요. 일어나요' 하는 것이 어찌 그리 마음을 상하게 하는지.
또 일어나셔서 정신을 챙기시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시는 분이라 식탁의자에 앉아서 한잠을 정신을 고루고 계셨지요.
음식 만든 저는 비오는데 장보러 나가고 무거운 걸 들고 와서 이것 저것 짧은 시간에 만드는 것에
완전 '희생정신에 자기도취' 되어가지고 엄청난 칭찬과 감동의 도가니탕이 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지요. 물론 9년을 살아온 사인데 '엄청난 칭찬과 감동의 도가니탕'은 늘 요리를 하면서 상상 속에나 있었던 일이지만요.
아~ 어제 저녁은 주무시고 나오셔서 사력을 다해서 고기 삶고, 무채 무치고, 콩나물국 끓여서 차려놓은 식탁을 보시자마자, 대뜸 하시는 말씀이 '어우~ 왜 이리 많이 했어?' 하십니다. '이야~ 맛있겠다. 이걸 언제 다 했어' 이 정도는 원래 기대를 안하구요. '그냥 시켜먹자니까 힘든데 뭘 준비했어?' 뭐 요 정도 대사는 쫌 기대를 했지요. '왜 이리 많이했어? 알았어. 많으면 내가 다 먹지 뭐' 하는 심정으로 빈정이 확 상해가지구 애꿎은 보쌈만 잘근잘근 무지막지하게 말도 안하고 씹어 줬네요.
오늘 차분히 생각해 보니, '정신실 그만 할 때도 됐는데' 싶어요. 남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남편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지 식대로 사랑이랍시고, 희생이랍시고 해놓고는 지가 원하는 방식대로 돌려주지 않는다고 삐지고. 아~ 이거 진짜 그만할 때도 됐는데.
생각해보니 이번 두 번의 요리는 가족에 대한 사랑보다 나의 요리와 나의 주부로서의 고귀한 희생정신에 도취되어 '사랑'이라는 조미료가 거의 들어가질 않았네요. 완전 '자아도취, 자아팽창' 거기다가
약간의 '분노'까지 첨가된 독이 든 요리였어요. 어쩐지 보쌈 먹고 났더니 완전 마음에 벌레가 여러 마리가 기어다니고 난리가 났더라.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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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ne 2008.03.30 21:56
난 왜 저 낙지볶음은 안하게 돼지? 하면 다들 좋아할텐데.
우리집은 '엄청난 칭찬과 감동의 도가니탕' 같은거 잘 나오는데.. 또 그만큼 '엄청난 실망과 품평의 도가니탕'도 마다하지 않거든. 어쩌겄어....
담엔 조금만 해~ 많으면 부르든가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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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st 2008.03.31 08:44
낙지도 보쌈도 너무 먹음직스러운걸요.
저 두개 다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요리라 제가 아주 좋아하지요.
그리고 제법 시켜먹는 요리 수준으로 예쁘게 장식하시공~
비오는 날 장봐서 저렇게 준비하는 건 요리의 신만 할 수 있을걸요.^^ -
h s 2008.03.31 09:02
글쎄???????
왜 그럴까?
저도 음식을 먹을 때 맛있어도 말을 안하고 걍 속으로만 맛있다.라면서 먹다가 아내에게 한소리 듣기가 일쑤죠.ㅋ
laranari님은 9년이나 되었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30년이 넘었는데 아직두 그런 버릇이 안 고쳐지고 있어요.ㅠ ㅜ
남자들이 각성을 해야 되는데 아내들도 걍 그려러니~~하세요.ㅋㅋ -
털보 2008.03.31 10:29
보기만 해도 또다른 생각이 절로 납니다.
또다른 생각은 차마 공개적으로 말씀드리긴 그렇습니다.
신의 피리님은 말씀 안하시는 건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행복을 말로 다 할 수 있는 말을 찾는다는 건 쉽지 않아 보입니다.
너무 행복하면 그때부터 제대로 말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씨, 부럽기 짝이 없다. -
신의피리 2008.03.31 21:01
나는 지난 토요일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른다오. 채윤이 땜에 그런 거 아니었수? 오늘에야 이 글을 보고 그날의 상황이 파악되었다오. 도대체 내 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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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2008.04.01 07:46
사모님글은 유쾌해요 ㅎㅎ
도사님의 마음은 그게 아니셨을거예요
어우 왜 이리 많어?가 와 나때문에 이리 많이 준비했어~고마워~하는 말이셨을거예요 ^^
저렇게 맛깔나게 이쁘게 식탁을 준비하고 남편을 섬기시는 사모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