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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정

내 생애 가장 늙은 날

larinari 2016. 6. 14. 23:42




나.는 오.늘. 내 생애 가장 늙은 몸을 살았다.

(오늘 내 몸은 내 생애 가장 늙은 몸이라고 꽃친의 J아빠가 알려주셨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오늘 내 생애 가장 늙은 몸, 노구를 하고 스펙타클한 하루를 보냈다.


한때 존경했을 뿐 아니라 젊은 날의 내게 푯대가 되었던 어느 분, 

그러나 이제 존경 대신 연민이며 푯대 대신 반면교사가 되어가는 분의

짧은 글을 읽고 마음이 헤집어진 날이다.

(그분도 생애 가장 연로하신 날 하루를 사시며 고생이 많으신 것이지)

인천의 어느 교회에서 진행하는 3주간의 부모교육 강의 첫날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이 살짝 너덜거리는 상태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행사 진행을 맡으신 S(멋지게도 여성) 목사님께서 환하게 맞아주셨다.

내 책을 정말 잘 읽으셨으며, 주변에 많이 소개했노라 하셨다.

진심이 전해져왔고, 짧은 인사를 나누고 앉았는데 속에서 불끈 힘이 솟아났다.

너덜너덜해진 마음 예쁘게 박음질 되는 느낌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 중간 잠시 쉬는 시간.

한 분이 앞으로 바람같이 나오셔서 코팅된 하트 하나와 쵸콜릿을 두고 가신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보고 그렸는데 실물이 더 예쁘다' 하시며

주황색 하트에 그려진 내 얼굴을 건네 주셨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어떻게 미리 이런 준비를 다?

가슴이 콩닥거리도록 고마웠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위로라든가 격려 같은 것들은 가끔 이렇듯 기습적으로 몰려온다.


강의 마치고 S 목사님의 전도로 내 책을 읽으신 후 

에니어그램 세미나까지 오셨던 사모님과,

그 사모님의 베프 사모님들과 함께 '사모들의 수다수다'에 점심을 곁들였다.

(여기까지도 하루 일기 분량으로 충분)


(여기서부턴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같은 날 저녁 이야기)

꽃친 부모모임이 있는 날이었고,

참 좋아하던 꽃치너 H네가 미국으로 가게 되어 송별모임이 되는 날이었다.

핸드드립 커피를 준비하겠노라고 큰소리 떵떵 쳐놓았었다.

(딴에는) 능수능란하게 핸드드립 세트를 챙기고 커피도 고이 갈아 준비했다.

보람차게도 대표님을 도와 저녁식사를 테이크아웃하고 모임 장소로 갔다.

자자, 이제 저의 핸드드립 커피를 기대하시라구요!

그렇지, 그래야 정신실이지.

드리퍼, 드립서버, 포트, 예쁘게 간 원두...... 어...... 어....... 여....... 여.......

여과지가 없다. 마지막에 챙긴 여과지는 아직 우리집 식탁에 계신 것인가.

여과지는 두고 온 주제에 오전에 했던 강의안 든 파일은 왜 또 가방에 넣어 왔냐고.

그러길래 정신실이라지. 나가서 구해보자!

을지로 입구역. 일단 편의점을 뒤졌다. 여과지를 파는 곳은 없다.

카페에 가서 구걸을 하자. 구걸할 태세를 갖췄으나 핸드드립 카페가 없다.

가까운 다이소를 검색했다. 명동이다. 다녀올 만 하다.

티맵을 켜고 을지로입구 사거리 한복판에서 입 헤 벌리고 서 있기 15분.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이 감각 설정하는데 최소 15분 소요. 

뉴욕도 아니고 파리도 아닌데. ㅠㅠ 아, 저, 저쪽이다.

중국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명동 거리에서 중국 관광객보다 더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스마트폰 지도 들여다보며 헤맨다. 겨우 겨우 도착이다! 없다. 다이소가 없다.

지도에 보니 근처에 하모니 마트. 여기라면 있을 거다. 가 보자.

헐, 영성강의 들으러 뻔질나게 다니던 길의 익숙한 마트이다.

부모모임 장소에서 곧장 왔으면 벌써 와서 사고 돌아가서 커피를 내렸을 시간이다.

샀다. 그래도 샀다. 모임 시작 40분이 지났으나 여과지를손에 넣었다.

성취감에 취해 꼭 끌어안고 밖으로 나왔다.

툭툭 차거운게 볼을 때린다. 기쁨의 눈물이 나도 모르게 나와 내 볼을 치는구나,

가 아니라 이것은 비. 한 방울 두 방울 굵어진다.

이 상태로 비까지 쫄딱 맞으면 더 극적이겠으나 드라마에는 취미가 없으니.

뛰자! 명동에서 시청 쪽 모임 장소까지 뛴다. 짧은 치마가 말려 올라간다.

숨이 자꾸 멎는다. 레이레이레이레이.... 으르렁으르렁 으르렁 대. 

지나가던 중국인 1, 중국인 2, 중국인 3과 계속 부딪히고 난리다.

(오전에 정장 쫙 빼입고 강의하던 나는 잊자고, 잊어버리자고)

땀인지, 빈지, 눈물인지. 그러나 도오착! 컴백 꽃친 부모모임.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듯, 명동 거리 중국인들은 본 적도 없다는 듯

의연한 태도로 커피를 내렸다. 


여과지 대신 강의안을 들고 간 나를 탓하지 않는다.

5분 거리를 25분 돌아가며 명동 바닥을 헤맨 거 속상하지도 않다.

이런 일 한 두 번도 아니고. 

게다가 오늘은 내 생애 가장 늙은 몸과 정신으로 산 날 아닌가.

내 생애 가장 늙은 몸과 정신으로 이 정도면 잘 살았다.


그나저나 주황색 내 얼굴, 적당히 낯설고도 친근하여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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