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 받아치기를

‘여보! 미안해’ 으~ 오늘도 또 듣는 ‘여보 미안해’. ‘대체 그렇게 쉽게 미안한 게 깨달아지는 실수를 왜 반복해?’. ‘미안하다구?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긴 하는 거야? 내가 어린앤 줄 알아? 미안하다는 말에 내가 마음 풀고 얼음 땡! 해줄 줄 알고? 치! 흥!’. ‘뭐야? 당신은 그렇게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야? 둘이 생각이 달라서 생긴 문젠데 왜 먼저 사과하고 그래? 잘난 척 하는 거야?’.

나는 천성적으로 싸움을 못한다. 일단은 분노에 차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무식하게 싸우는 싸움은 고사하고 정말 싸움이 필요할 때조차도 잘 싸우는 걸 하지 못한다. 물론 싸움을 못한다고 착한 사람일리 없다. 싸움을 못하는 대신 뒤에서 호박씨 까는 것으로 쌓인 감정들을 해소하는 방식이 있으니까.

결혼 전까지는 싸움을 못하는 성격, 또 싸울 일도 대충 회피하고 시간이 해결해 주는 그 만큼만으로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데 크게 문제가 없었다. 예를 들어 가족들과 갈등이 생겨도 감정이 정리될 때까지 말 안하고 눈 마주치지 않고 지내다가 어영부영 또 말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친한 친구와는 갈등이 생길 일도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역시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누려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 남편과는 그렇지 않았다. 일단, 남편은 문제나 갈등은 반드시 대.화.로 풀고 넘어가야 하는 성격일 뿐 아니라 나 역시도 ‘싸움’이라는 긴장된 순간 이후에 해결을 잘 해 내지 않아서 그것이 쌓이고 쌓여 고착된다면 부부가 하나 되는 일이 점점 요원해 질 것이라는 본능적인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 전 친정 엄마나 친구들과 갈등을 해결하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딱 그 수준의 가정을 만들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잘 싸우는 법’을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했는데....

평소 기분이 좋을 때는 남편보다 몇 배의 말을 쏟아내고 표현을 하는 내가 긴장 상태가 되면 말 한 마디 하기가 그리도 어렵다. 그러면서 내게 있어 갈등을 대화로 풀어내는 훈련이 얼마나 황무지였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깨달으면 뭘 하나? 최소한의 쌓인 내공이 있어야 대처를 하는데 그 훈련이 나는 이제야 시작이니 말이다.
갈등이 생기면 일단 숨 한 번 몰아쉬고는 차부~운한 목소리로 ‘여보! 미안해’로 시작해서 줄줄줄줄 사태를 설명하고, 그 순간 자기의 느낌을 설명하고, 조목조목 따져서 사과하는 남편이 어찌나 고맙지는 않고 얄미울 뿐인지.... ‘그래 너 잘났다. 너는 감정도 없냐? 감정조절이 그렇게 잘 돼? 너 인격 한 번 훌륭하다. A~C! 나는 왜 이리 말이 안 나오는 거야? 안 나오는 말 대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먼저 나오니 나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밖에.

Jung의 심리유형 식으로 말한다면 사고형의 남편과 감정형의 내가 갈등을 해결 하는 데는 이런 어려움이 있었다. 즉 타이밍의 문제였다. 갈등이 발생하는 즉시 남편은 ‘여보! 미안해’ 이러면서 해결의 국면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나로서는 갈등으로 생긴 감정을 추스르고 다스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로 사랑하는 남편과 가슴으로 사고하는 나 사이에 시간은 물론 정서상의 거리가 얼마나 컸는지...내 안에서 이런 감정의 폭풍이 불고 있는데 드러나는 양상은 늘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말하자면 삐져 있는 듯 보일 뿐이고 거기다 대고 남편은 계속 화해를 요청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지날수록 갈등이 일어난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이제 나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대화도 할 줄 모르는 미성숙한 인간인 것 같고 저 사람은 마음이 태평양 같이 넓어서 내 이 삐짐과 심통 속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화해의 제스춰를 보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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