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늑대 아이>를 보고 반해버린 채윤이가 '이런 느낌이 처음'이라며 한 번만 더 보게 해달라고 조른다. 오늘 아침 조조로 재관람을 하러 갔다. 덕분에 엄마 아빠는 늑대 인간 없는 조용한 집에서 휴일의 여유를 누린다. 아이들이 없는 집은 어쩌면 이렇게도 고요하고, 깔끔하고, 여유로운 것일까?






며칠 전 넷이서 이 영화를 보면서 옆에 앉은 남편과 얼마나 눈빛 교환을 해댔는지.... 감독이 우리집엘 와 봤나? 늑대 누나 유키, 늑대 동생 아메는 캐릭터가 우리 집 아이들과 닮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게다가 어렸을 적 생긴 모습까지 비슷해서 말이다. 밖을 향해 나가고, 주장하고, 덤벼보는 유키 아니, 채윤이. 자기 안으로 숨어들고, 물러서고, 외부를 향해서는 두려움을 눈으로 바라보는 아메 아닌 현승이. 집안을 어질르고 시끄럽고 싸우고 사고를 치는 이 녀석들이 두 마리가 망아지인 줄 알았더니 '늑대 아이'였다는 새로운 정체성 발견.






아이들 말마따나 누나인 유키가 어렸을 적 더 늑대스럽고, 아메에게선 늑대스런 야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둘의 마지막 선택이 의외의 반전이었고 영화에서 가장 끌리는 점이었다. 어느 날 갑자가 이유없이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두 아이가 자라면서 '아, 저래서 저런 선택을 했구나.' 공감하게 되었다. 그 개연성 있는 성장과정이 채윤이 현승이 엄마인 내게 큰 위로와 통찰을 주었다.








외향형의 어렸을 적 유키는 있는 그대로의 늑대의 야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외향적인 유키는 바깥 세상을 향해 내달리려 한다. 보육원에 가고 싶어하고, 학교에 가고 싶어한다. 시선이 밖으로 가 있는 유키는 외부에 자신을 맞추기 시작한다. 당연한 일이다. 보이는 것이 그것이니. 친구들과 지내면서 더더욱 사람스러워지고 온전히 사람이지 않은 자신으로 인해서 어렸을 적과 다른 모습의 소녀로 자란다. 부끄러워하고, 소심해지고, 숨고 도망하는 소녀가 된다.

소녀가 된 채윤이를 향해서 마음 한 구석 미안함이 있었다. 늑대의 야성을 가진 거침없는 아이를 내가 너무 가뒀던 것은 아닐까? 아무데서나 귀를 내놓고 늑대가 되면 안된다고 너무 눌렀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오늘 채윤이가 저렇게 수줍음이 많아지고 말 수가 적어진 것은 아닐까? 아기 적 채윤이 모습을 생각하면 더더욱 자책감이 많이 들곤 했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그러했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초등 이전 모습이 있었다면 나 외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인식되고 더 많이 의식되면서 내향적인 아이처럼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청소년기 이후에 '외향적인 나'로서의 정체성을 두 번째로 접하게 되었다. 아, 그랬었다. 인간을 선택한 유키의 선택을 지지한다. 어렸을 적 야성은 어디가고 삐쭉 키가 자라고 조용해진 유키 아니 채윤이의 오늘을 감사하고 사랑한다. 채윤이는 채윤이 만의 길을 잘 찾아갈 것이다. 더불어 만큼 기르느라 애쓴 나 자신도 토닥토닥이다.






고양이와 싸우고 엄마의 무릎에 파묻혀서 '엄마, 괜찮다고 말해줘.' 하던 아메에 네 식구 모두 뒤집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 씩 '엄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내가 잠들어도 와서 안아주고 뽀뽀해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줘.' 하는 현승이가 우리 집에도 있지 않은가? 낯선 모든 것에는 일단 위축되고 두려워하는 현승이가 마음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지나치게 섬세하게 느끼고 느낀 것을 반추하며 어린아이 같은 '거침없이 떼부리기'가 없는 현승이 말이다. 늑대의 야성을 가지고도 인간 아이들에게 맞기나 하는 아메처럼.

내향적인 아메는 자신의 내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때문에 덥석덥석 친구를 사귀지도 못한다. 시선이 밖으로 향하는 유키 누나는 친구들을 거울 삼아 자신 안에 있는 인간성을 계발해 나가고 사람을 지향하게 되는 것 같다. 반면 아메는 또래를 바라보지 않는다. 오직 자기 내면을 바라보기 때문에 더 깊이 고뇌하며 홀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자랄수록 아메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신의 내부에서 결정한 것이면 모든 것을 감수하고 가는 힘이 생긴 것이다. 그 좋던 엄마를 떠나 유유히 숲으로 간다.

부드러워도 너무 부드러운 현승이로 인해서 사랑을 새로 배웠다. 아이를 안아줄 때 그것이 내게도 위로가 된다는 것을 배웠고, 이렇게 나를 좋아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으로 자존감 향상의 치유(까지나?ㅎㅎㅎ) 있었던 것 같다. 하다못해 누나만 옆에 있어도 엄마 품에 안기고 치대기를 하지 않는, 외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면 결코 움직이지 않고 얼음이 되고마는 현승이가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현승이는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더 독립적인 사람으로 자랄 것이다. 아메가 그러했듯이.






문제는 엄마다. 엄마가 유키와 아메의 엄마 '하나' 같은 엄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울지 않는 엄마, 울 일이 있으면 오히려 웃는 엄마. 아니 웃을 수 있는 엄마. 그런 엄마는 세상에 없다. 없을 것이다. 다행이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 현승이가 대뜸 엄마를 '나쁜 엄마'로 규정하면서 아빠에게 '왜 더 착한 여자랑 결혼하지 그랬냐?' 말한 것은 이느무 '하나 엄마' 때문이다. (씩씩)
'하나' 같은 엄마는 없지만 늑대 아이의 엄마 '하나'에게 하나 배울 것이 있다. 이래도 아프고 저래도 아프지만 두 아이의 선택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떠나보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이 감동적이다. 그래서 기꺼이 떠나보내고 홀로 있을 수 있는 힘, 그런 힘을 꿈꿔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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