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여러 일정이 취소되며 일상의 여백이 생겼다. 누구에겐 여백이고 누구에겐 상실감 불러일으키는 공백. 채윤이는 작심하고 2박3일 에니어그램 내적여정 피정을 예약해 뒀었다. 엄마가 피정비를 내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제 스스로 신청하고, 비용을 부담하면서 말이다.

 

늘 하는 '제 자신'에 대한 고민이지만, 대학생이 되고 학교와 교회에서 성인 자아로 살아가는데 감당할 몫이 가볍지가 않은 것이다. 그런 앤 줄 몰랐는데 결국 엄마 아빠를 닮는 것인지 책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록산 게이, 레이첼 에반스, 도널드 밀러, 브레네 브라운 같은 책을 딸과 함께 읽는 날이 오다니!

 

가면인지, 진짜 자기 얼굴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때로 두려워서 울고 막막하여 입맛을 잃기도 하더니. 급기야 "엄마, 나 엄마 내적 여정 세미나 들어도 돼? 수강료 다 내고 들을게." 하고는 1단계 여정을 들었다. 그 어떤 수강자보다 진지하게 에니어그램에 자기를 비추고, 나의 딸이 아니라 제 자신이 되어 제 번호를 찾더니 급기야 '엄마가 어릴 적부터 찍어준 유형은 틀렸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어린 시절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할 텐데, 나랑 같이 하기는 어렵겠구나 싶어 피정을 추천했다. 내가 배웠던 박정자 수녀님 하시는 내적 여정으로 가서 1단계부터 다시 듣고 심화과정(어린 시절 작업) 듣는 게 어떠냐고. 무슨 뜻인지 알아 듣고는 바로 신청하고는 피정의 시간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취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알바도 빼놓았고 텅 비워놓은 시간. 갑자기 생긴 이 시간을 여느 날처럼 집에서 뒹굴거리며 보낼 수는 없다고 '엄마 여행 가자, 엄마 여행 가자' 노래를 했다. 나 역시 토요일 내적 여정을 취소해 놓은지라 여백이 생겼으니 그래 어디든 가자!

 

엄마가 밥 사면 제가 나서서 커피 살 줄 알고. 친구처럼 하루를 보냈다. 오가는 차 안에서 나누는 얘기는 이십 대나 오십 대나 결국 관계, 자아, 두려움 같은 문제로 어렵다는 것을 확인한다. 정말 친구 같다. 아주 닮은 친구. 어쩌면 너 엄마를 그렇게나 닮았니? 

 

언젠가는 어린 시절의 엄마를 제대로 한 번 만나야 할 것을 안다. 채윤이가 내 세미나에 오던 날, 얼마나 마음이 복잡하고 두려웠는지 모른다. 결국 지금 겪는 자아의 문제는 생애 초기 나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것일 텐데. (엄마 노릇을 잘했고, 못했고의 문제는 아니다. 엄마와 아이 존재론적인 관계 얘기다.) 내적 여정을 하고 아이들 키우면서 언젠가 한 번은 겪을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두렵지만 피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맨몸으로 맞을 일이다. 아이가 알을 깨고 성장할 때마다 나도 함께 부서지면서 성장할 것임을 아니까. 날은 춥고, 메마른 겨울 수목원은 조금 황량하지만 같이 걷고 (사려 깊은) 수다 떨며 정겨웠다. 모녀 간의 정(情)보다 자매애에 가까운 정. 내적 여정의 젊은 벗을 하나 만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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