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서치, '책만 보는 바보'라고 한다. 조선시대 선비 이덕무가 그리 불렸다고 하고, 그 이야기를 재밌게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책만 보는 바보> 가끔 조롱하듯, 안쓰러움을 담아 내가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바보, 책만 보는 바보" 그렇다고 비하나 연민은 아니다. 물론 이도 저도 못하고 책이나 보는 내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무력감이 싫지는 않은 것이다. 아니, 10년 전 그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오직 무력한 무력감이었으나 요즘은 아니다. 이런 나라도 스스로 받아주는 마음 자락이 한 뼘은 생겼다. 그리하여 무력함이 마냥 무력하지만은 않다.

동시에 평균 일곱 권 정도의 책을 읽는 것 같다. 원고나 강의를 위해 읽는 책이 두어 권. 한 권 정도는 필사하며 읽고, 두어 권은 연구소 스터디를 위해 읽고, 그냥 좋아서 읽는 책이 한 권에서 세 권 정도. 그냥 좋아서 읽은 책이 동시에 끝이 났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책은 신간 알림을 신청해놓고 누구보다 먼저 따끈한 상태로 구입하여 받아보곤 하는데, 이번에 나온 『보편적 그리스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한달음에 읽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아껴 읽느라 혼났다. 새로운 원고에 몰입하기 위해서 기를 모으는 중 롤로 메이의  『창조를 위한 용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 역시 빨리 읽고 끝내기가 아까워 조금 읽고 딴짓, 몇 페이지 읽고 스마트폰 보게 하는 책이었다.

두 저자가 내게 같은 말을 한다. 코로나로 인해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고 있는 나날, 연결들이 끊어지는 듯하고, 폐렴의 바이러스보다 혐오의 바이러스로 더 숨이 막히는 시간을 보낸다. 갑작스런 사고로 요양병원에 간 엄마를 면회할 수 없는 안타까움. 예정된 모든 강의가 취소되며 코가 석 자, 넉 자가 되는 현실이다. 이렇게 얻은 불안한 시간, 텅 빈 시간을 책만 보는 바보로 지내는데 저자들이 말한다. 절망할 만큼 절망하라고, 그래도 죽지 않는다고. 창의성은 불안에서 나오고, 불안을 맞서는 용기 없이 새로운 통찰은 얻어지지 않는다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 무엇도 쉽게 초월하지 말라고.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어설픈 순진함에 머무르지 말라고. 어쩌면 두 책이 같은 말을 한다.

유아적인 순진함에 머무르지 말고 정직하게 무질서의 세계로 발을 내딛어 두 번째 순진함이라는 깨우침의 단계, 재질서의 단계에 이르라는 격려를 들으며 『보편적 그리스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책만 보는 바보를 기다리는 다음 책은 『권력과 거짓순수』이다. 첫 장 첫 문장이 이렇다. 

젊은 시절 나는 순수를 소중히 여겼다. 권력을 나쁘게 생각했고 싫어했으며 폭력을 혐오했다.

젊은 시절 그랬던 롤로 메이가 책을 쓰는 나이에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궁금함과 호기심 폭발이다. 일단 달려보려고 한다. 릴레이를. 독서 릴레이를. 알 수 없는 시절에 달리 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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