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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마음의 환대

멸치를 다듬으며

larinari 2012.03.20 21:06





영적인 훈련에서 몸의 훈련이 중요하다고 한다.
감정과 생각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날뛸 때 지금&여기를 우직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 몸이다.
감정과 생각은 수없이 나를 속이지만 몸은 거짓말 하기가 어렵다.
몸을 알아차리는 것에 민감해질수록 내가 모르거나 모른 척 하고 싶은 마음 알기가 수월해진다.


설거지나 가사 일을 하면서 몸의 감각을 디테일하게 느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유익이 있다.
난 요리 전 시간을 많이 들여 재료 다듬는 일이 별로다.
가령, 김치를 위해 배추나 무를 다듬거나 한 다발의 차를 까는 일 등...
단순작업을 길게 해야하는 일들 말이다.


멸치를 다듬었다. 꽤 많은 양의 멸치를 다듬어 똥을 뺐다.
똥만 딱 빼고 머리며 뼈까지(그 알량한 멸치의 뼈! ㅋㅋㅋ)통째로 갈아두고 멸치 다시를 만들 때 쓴다. 가사 일 중에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된장국을 끓이거나 오뎅국 같은 걸 끓일 때 한 수저 푹 떠서 넣으면
왠지 식구들의 뼈가 튼튼해질 것 같아 뿌듯이다.


멸치를 다듬으며 꼬리리하며 비릿하고 짭쪼롬한 냄새와
손끝에 느껴지는 깔끄럽고 눅눅한 촉감들을 느낀다.
이 일이 매우 매우 의미있게 느껴진다.
40분의 음악치료 세션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
여덟 시간의 에니어그램 강의를 하는 것에 결코 견주어 밀리지 않을 의미이다.


로렌스 수사께서 평생 부엌일을 하면서 훈련하고 느꼈던 하나님의 임재연습은 이런 것이었을까?
나이가 들수록 몸으로 하는 일들을 더 의미있게, 귀하게 여기며 살고 싶고 싶다.
몸으로 하는 일상의 단순한 일들에 더욱 영원을 느끼며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


멸치 똥 빼면서 멀리까지 왔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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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Comments
  • 프로필사진 iami 2012.03.21 11:33 멸치똥을 뺐기에 올 수 있는 구석이죠.^^
    꼬리리, 비릿, 짭쪼름한 냄새와 깔끄럽고 눅눅한 촉감 뒤에야 다시가 나오잖아요.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2.03.21 18:00 신고 아하! 그렇군요^^
    멸치 똥 빼기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네요.ㅎㅎ
  • 프로필사진 신의피리 2012.03.21 14:21 아무 생각없이 때 되면 식탁에 앉아
    맛있다, 맛없다 아무 말 없이
    배만 채우고
    고맙다, 수고했다 아무 표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갔던
    지난 날들의 내 밥상 습관을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ㅠ
    멸치 반찬 하나에
    이렇게 귀한 은혜가 스며들어 있엇건만...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2.03.21 18:01 신고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회개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회개할찌니라.
  • 프로필사진 이과장 2012.03.22 09:14 ㅋㅋㅋ 우리 고모고모부 짱! ^^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2.03.22 09:59 신고 이과장!
    응원은 둘 중 하나만 하는기야.ㅋㅋㅋ
  • 프로필사진 오나전공감녀 2012.03.23 00:13 저두..요즘 8평의 방을 정돈하는데도 힘써요 가사일이 영성훈련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열심히 했었거든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가사일은 남의 이목이 닿지 않기 때문에 인정을 받을 수가 없기 때뮨에.. 이거슨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순종하는 훈련이라고..
    어쩌다보면 빨래를. 어쩌다보면 화장싱 청소를.
    어쩌다보면 바닥청소를..
    그러다보면 시간이 후딱 지나가요
    결국 자취하나 안하나 시간은 비슷해요
    ㅠㅠ

    그런데 그런거 느끼신적 있으세요?
    저는 보이지 않게 이불 속으로 잠옷들을 감출 때 서랍 안에 쑤셔 넣을 때 이건 나의 내면이지 않을까..하고 생각을 해요.
    뭔가 정돈하고 직면하려 하지 않는 그런 나의 내면 말이에요..
    모님 포스팅에 오나전 공감했습니다..
    비록 멸치따진 않았더라도 ㅋㅋㅋ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2.03.23 09:58 신고 어린이를 위한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에서 주인공 아이가 자기 방에 찾아오신 예수님과 얘기하면서 열린 옷장 서랍을 발로 몰래 닫는 장면 생각나는구나.^^

    우리 내면은 잠옷을 이불 사이에 구겨넣은 정도가 아니라 실크블라우스 정장 쟈켓 같은 것들도 아무렇지 않게 쳐박혀 있고 엉켜있고 그럴거야.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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