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고난주간을 지나던 어느 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가벼운 증상으로 입원하셨던 아버님이 위암 선고를 받으셨다. 60대, 아니 50대 같은 70대 아버님이었다. '청천벽력'이라는 말을 처음 경험한 날이다.  처음 병원에선 6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 했지만, 2개월이라고 하더니 50일이 되지 않아 6월 7일 우리 곁을 떠나셨다. 50일은 그렇게 건강하셨던 아버님의 병을 받아들이는 것도 짧은 시간이었다. 죽음은 늘 그렇게 예고 없이 우리를 덮친다. 아버님의 병든 몸에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너무 짧은 봄이었다. 하지만 그 짧았던 봄은 내게 기나긴 여운을 남기며 소위 '부활 신앙'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비로소(그렇다, '비로소'다) '부활 신앙'을 실존적으로 믿게 되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이 구절을 전율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믿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 믿어졌다. 천국이 가깝게 느껴졌다. 백지 한 장 너머에 아버님 계신 천국이 실재하는 것 같았다. 반짝, 하고 마는 믿음이 아니었다. 더는 신학적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었다. 이생의 짐이 버거워 그려보는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피부에 닿는 실체였다. 부활과 천국이 관념이 된 것은 일찍이 재난처럼 닥친  아버지 죽음의 경험이었다. 목사 아버지의 죽음이 천국의 관념을 심어주었고, 관념에 붙들려 분열의 일상을 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믿음 없는 시아버지의 죽음은 '몸'의 부활을 일깨웠다.   

 

아버님과 함께 한 마지막 50일, 아버님 몸과 함께 하였다. 학교 숙제, 피아노 연습으로 할 일이 태산이었지만 거의 매일 저녁, 모든 것을 멈추고 아이들과 함께 아버님께 갔다. 고작 가서 멍하니 텔레비전보다 오는 것이 전부였지만 무작정 갔다. 원래 말씀이 없으시지만 더욱 조용해지신 아버님, 가까스로 농담이라도 한 마디 하시면 가슴에 금이 가곤 했다. 주방 구석으로 가 숨죽이고 울었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시기 전날에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두둑이 주셨다. '고맙습니다' 늘 하던 말 외에 할 수 없는 아이들, '그래' 하시는 아버님. 아무렇지 않아서 더 특별한 고통이었다. 설마 이것이 마지막일까? 마지막 용돈일까? 설마 그럴 수 있을까? 스치듯 생각했지만 마지막이었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셔서는 더 빠르게 멀어져 가셨다.

 

세월이 지나야 보이는 것이 있다. 돌아보면 그 50일, 아버님의 죽음 앞에서 의연했었다. 겨우 예배를 가 주는 정도로 신앙생활 하셨던 아버님의 '구원의 확신'에 안달복달했고, 내내 눈물로 보낸 50일이지만 꽤 어른스러웠다. 회피하지 않았다. 야위어 가는, 두려움에 더욱 긴장되어가는 아버님의 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래 바라보고 마음에 담았다. 한 달 남았다는 진단 후에는 손발 오그라드는, 웬만해서는 누구한테도 할 수 없는 표현을 담아 메시지를 드렸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그 문자를 확인조차 하실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수줍음이 많은 아버님께서는 평소에는 거의 말이 없으셨다. 특히, 그 50여 일은 거의 입을 떼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님께 평생 '사랑한다'는 고백을 제일 많이 들은 사람은 채윤이와 현승이다. 그 다음은 나다. 비록 문자였지만 생애 마지막 시간에 남겨주신 말씀이다. '사랑한다 둘째야'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며느리'가 아니라 '딸'로 등극시켜주셨고, '둘째 딸아, 둘째 딸아' 하고 불러주셨다. 

 

아버님과 떠나시기 며칠 전, 오후 내내 아버님 곁을 지킬 시간이 있었다. 전날 채윤이가 "할아버지 손톱이 너무 길어요" 했던 말이 생각 나 손톱깎기를 챙겨갔다. 손톱 발톱을 깎아드리고, 손을 꼭 잡아 드리고, 쓰다듬어 드렸다. 죽음 같은 잠을 주무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음 찢어지는 슬픔에도 피하지 않았다. 어려웠던 시아버님이었다. 수줍음이 많으셔서 더 조심스러웠다. 어쩐지 하나도 어려운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그날 집에 와 긴 글을 썼었다. "아버지다, 내 인생 두 번째 아버지다." 첫 아버지를 죽음에게 뺏길 때는 속수무책이었지만, 그렇게 당한 재난으로 평생 구멍 난 마음으로 살았지만, 두 번째 아버지의 죽음은 아버지보다 내가 먼저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 후 강의하러 나가려는 순간 난생 처음 듣는 목소리, 울음에 묻힌 격앙된 목소리의 남편 전화를 받았다. "어서 와, 빨리 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대로 달려가 꼬옥 감은 아버님의 눈을, 아직 온기가 남은 아버님의 손을 매만지고 붙들었다.  

 

평생 그렇게 두려워 했던 죽음을 어떻게 그렇게 마주할 수 있었을까. 그 누구도 아닌 착한 아버님, 우리 아이들을 살뜰히 키워주신 것에 대한 사무치는 고마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암 선고받으시던 날, 병원 바닥을 뒹굴며 "아빠, 아빠" 하며 울던 시누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채윤, 현승이의 '낮의 엄마'인 할아버지인데, 아이들이 느낄 상실감을 어떻게 만져줘야 할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평생 아버지와 살갑게 지내지 못한 남편이 진 죄책감의 짐이 가여워서 나라도 잘해야겠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즈음 나는 '신앙 사춘기' 어두운 숲에 있었다. 정점을 지나 일말의 빛을 감지하고 있었던 때다. 어릴 적 아버지 이미지와 혼재된 하나님, 그리운 아버지인 듯 무서운 심판자인 듯한 하나님 이미지를 버리고 새로운 관계에 돌입하는 중이었다. 아버지 죽음이 남긴 상실감의 공간을 채우던 종교 중독을 알아채고 멈추는 중이었다.

 

위로부터의 영성에서 벗어나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걸음마 하듯 배우는 여정에 있었다. 신앙의 이름으로 초월하고 회피했던 인생의 어두운 면들을 비로소 마주하는 힘이 조금 생겼을 때, 그때 아버님의 죽음을 맞은 것이다. 암 선고는 아버지 죽음처럼 예고 없이 닥쳤지만, 시간이 주어졌다. 6개월 남았습니다, 아니 2개월 입니다, 한 달입니다. 6개월 예상이 결국 50일이 되었지만 아버지 죽음과 견주면 예행연습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50일, 허튼 부활 신앙 같은 것으로 도망치지 않고 오직 아버님의 몸을 마주했다. 교회에서 심방 오신 분들이 싫다 하시면 휠체어를 밀고 피하게 해 드렸다. 물론 구원의 확신을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만만치 않았다. 마음의 전쟁은 끝이 없었지만 적어도 아버님의 몸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아버님을 보내드린 후 부활의 소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천국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 소망으로 아버지 죽음 또한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아버지를 뺏어간 하나님도 화해했다. 아버지 죽음의 트라우마를 아버님 죽음으로 세심하게 치유해주시는 것 같았다.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님, 하늘 아버지와 두루 편안해졌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사라졌다고 존재가 사라질 수는 없다. 불가능이다. 아버님은 몸 그 이상이었다. 암 환자의 몸으로 사신 세월은 짧다. 아주 오랜 시간 힘세고, 건강하시며, 좋은 손재주로 뭐든 고쳐주시고, 닭백숙도 잘 끓이셨다. 그런 몸이었다. 몸이 쇠약해졌다고 아버님의 존재가 어찌 되지는 않았다.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아버님은 존재하셔야 마땅하다. 교리에 매여 아버님의 구원을 운운하던 50여 일이 부끄럽고, 부끄러울수록 아버님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이 깊이 믿어진다. 아버님이 남기신 가장 큰 선물이었다. 

 

 

 

 

  1. BlogIcon pratigya 2020.04.02 00:14 신고

    그 선물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한 우리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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