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단순한 과거 경험의 퇴적이 아니다. 편집된 과거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당신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그때그때마다 당신의 과거는 ‘개정판’으로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세월이 만드는 거리는 그때 그 사건을 달리 보게 한다. 엄마 죽음이 불러낸 아버님의 죽음은 다시 개정판이 되었다. 엄마의 마지막 시간, 격리된 몸이었다는 것이 떨쳐지지 않는 고통이다. 아버님과의 마지막 시간을 다시 떠올리니 얼마나 축복된 시간이었던가 싶다. 1주기 즈음 쓴 글이 있다. 『나의 성소 싱크대 앞』에 실었던 '아버님의 소주잔'을 다시 읽어 보았다. 아버님과 함께 한 시간이 오늘도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구나 싶다. 아버님의 소주잔은 내 마음에 살아 내 종교적 독선에 찬물을 끼얹어 일깨우고 있다. 채윤이와 현승이가 이렇게 잘 큰 것은 착한 할아버지 덕분이다. 아이를 키우며, 내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님의 헌신이었다. 오늘 내 일상에 아버님의 삶이, 그렇다 '삶'이다. '죽음'이 아니고. 종말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고 계신다. 어제 쓴 글과 겹치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나름의 새로운 개정판이다. 잘라내고 오려붙이고 확대하고 축소하며 반복되는 기억, 편집된 과거를 한 번 더 읽어주시길. 

 

 

아버님의 소주잔

설거지를 하려고보니 그릇 사이로 소주잔 하나가 뒹굴고 있다. 배시시 웃음이 샌다. 큰 녀석이 그릇장 안쪽에 있던 걸 꺼내서 물 컵으로 사용하고 휙 던져 놓은 것일 터이다. 보수 기독교 골수분자의 집에 웬 소주잔? 이것은 정통 보수 기독교 골수분자인 며느리가 단 한 분, 시아버님을 위해서 마련한 아버님 전용 소주잔이다.

나는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대학(그것도 걸걸한 여대)도 다니고 사회생활도 했기 때문에 술자리, 술 문화가 전혀 낯설지 않지만 결혼하기 전까지 집안에서의 음주행위는 상상도 못하고 자랐다. 신혼 초에 시댁에서 잔치가 있어서 처음으로 설거지 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설거지 그릇 중에 소주잔이 여러 개 있었는데 살짝 손이 떨리는 거였다. ‘아, 내가 술잔 설거지를 하다니. 우리 엄마 알면 뭐라 하실까?’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문화충격이었다.

겉으로는 ‘술도 같이 한 잔 안 마셔주는 아들 소용없다’며 호기로우셨지만 아버님도 늘 아들 며느리 눈치를 보셨다. 착하고 소심하신 아버님은 같이 식사를 하러 나가서 한 잔 생각이 나셔도 냉큼 주문을 하지 못하셨다. 어느 날 부턴가 식당에 가면 쭈뼛거리시는 아버님에 앞서 내가 먼저 소주 한 병 주문을 했다. 착하고 소심한 아버님의 약주사랑이 참 곱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평소 말이 없으신 분이 약주 한 잔 하시면 유쾌해지시기 때문이었다. 식당에서 뿐 아니라 아버님 생신을 우리 집에서 차려야 하는 날에 장을 보면서 과감하게 소주 몇 병을 카트에 담았다. 상을 받으시고 뭔가 허전하다 싶으셨던 그 순간에 냉장고에서 나온 초록색 병에 ‘아니, 이걸 샀어?’ 하면서 좋아하시던 아버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집에 소주잔이 없어서 머그컵에 소주를 따라 드셨고, 그 이후 언젠가 아버님만을 위한 소주잔을 갖춰 놓게 되었다.

그 힘들다는 ‘워킹 맘으로 두 아이 양육하기’가 아버님의 도움으로 참 수월하였다. 아이를 좋아하실 뿐 아니라 여성보다 더 섬세하고 살뜰하게 보살피시는 아버님으로 인해 남보다 수월하게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느 정도 독립이 되었을 때도 필요할 땐 언제든 집으로 오셔서 유치원 마친 아이를 받아주시고 간식을 챙겨주시기도 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 씩 집에 오셔서 방과 후의 아이들을 돌봐주시던 기간이 있었다. 막내아들이 늦깎이 목회자가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도 했다. 일을 하고 밤에 집에 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면 검정 비닐봉지로 꽁꽁 싸인 병이 하나 들어 있다. 낮 시간에 아이들과 떡볶이 간식 사다 드시며 한 잔 걸치시고 남은 막걸리였다. 행여 목회자 아들 집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가 누가 될까봐 어찌나 꽁꽁 싸매두셨는지…….

무엇을 드셔도 척척 소화시키신다고 자랑이시던 아버님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시고 50여일 투병 끝에 하늘나라로 가신 지 1년이다. 아버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받아 들이시기에는, 남은 우리들이 떠나 보내드릴 준비를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당황해하며 혼란스러워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수십 년 교회를 다니셨지만 예수님을 향해서 살가운 표현 한 번 입 밖으로 내지 않으셨다. 믿음 좋은 아내와 자녀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가신다는 식으로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는 빠지지 않으셨다. 교회 일에 열심인 어머님을 향해 ‘내가 수염 영감탱이 예수한테 마누라를 뺏겼어. 아니 영감탱이가 아니지’ 하셨다. 늦게 신학교에 가서 열정을 다해 공부하는 아들이 좋은 성적에 장학금을 받아오자 못내 아쉽다는 듯 ‘이제라도 그 머리로 공무원 시험 봐라’시며 먹고 살 걱정을 하시기도 하였다.

그런 아버님을 바라보며 아버님과 함께한 마지막 50일 동안 내가 한 짓이 무엇이었던가. 믿음 없는 아버님이 입술로 고백하시도록 해야 한다며 속으로 얼마나 안달복달 했던지. 맘먹고 사영리를 들고 아버님과 독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주변에서는 그런 얘기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막내며느리가 제격이라며 서둘러라하는 사랑어린 재촉도 있었다. 새벽기도에 가면 내 불안에 겨워 ‘이 땅을 떠나시는 아버님이 당신의 품에 눈뜨게 해달라’며 빗물 같은 눈물을 쏟아내곤 하였다. 설상가상 아버님께서는 심방오신 분들과 예배드리는 걸 거부하셨다. 마지막 호스피스 병동에서 간호를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병문안을 오셨다. 간단히 예배드리려 하는데 고개를 돌리신다. 싫어하시는 것이 역력한데 그 자리에 계시도록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버님, 한 바퀴 돌까요?’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기도하시는 분들을 뒤로하고 나오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한편으론 불안의 솜방망질이던지. 믿음, 구원, 믿음, 입으로 시인, 구원.... 아, 혼란스럽다.

남겨진 시간이 얼마만큼 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버님 하늘나라로 가시던 날 우연인지 (그 분이 계획하신 필연인지) 연거푸 세 번 씩이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미 의식을 많이 잃으신 아버님께서는 그저 모든 것을 보호자의 판단에 내어맡기고 누워계실 뿐이었다. 마지막 예배는 막내아들이 함께 한 자리였고 예배를 마치고 찬양 한 번 더 부르자는 목사님의 제안이 있었다.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 찾아 오셨네’를 부르는 중 ‘예수 안에 생명 있네.’ 후렴을 부르는 순간 우리 착한 아버님 가만히 이 세상을 붙들었던 손을 가만히 손을 놓고 하늘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것처럼 이 땅에서의 마지막 50일 동안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큰 육체적 고통도 없이 그렇게 지내시다 하늘 그 곳으로 돌아가셨다.

돌이켜보면 아버님의 마지막 50일은 한 없이 고요하였는데, 내 마음은 양철지붕에 소나기 떨어지듯 요란했다. 그 요란한 양철지붕 아래에는 ‘나는 믿음이 있고, 아버님은 믿음이 없다’는 일말의 의문도 없는 전제가 숨어있다. 도대체 그 근거 없는 판단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이란 말인가? 아버님 하늘나라로 떠나신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일하는 엄마’ 였던 내게 든든한 기댈 언덕이셨던 아버님께서 떠나신 자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돌봐주시던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돌볼 만큼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아버님께서 내게 무엇보다 큰 숙제와 더불어 엄청난 선물을 남기고 가신 탓이다.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는 한 마디를 마음 깊은 곳에 넣어주시고 가신 탓이다. 마지막 50일 ‘아버님 믿음의 고백, 입술의 고백....’ 이러면서 안달복달 하던 내 마음의 깊은 동기가 진정 천국에 대한 소망이었는지, 믿음의 기도였는지를 처음부터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님의 믿음이 아니라 ‘내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하는 영원의 원점 같은 곳으로 돌아와 섰다.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하던 기간과 신종플루 걸렸던 주간 외에는 주일에 빠져본 적이 없다?(이걸 가지고 주일 성수했다며....), 청년 때부터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많은 교회봉사를 했다? 미운 사람이 생겨도 ‘하나님, 원수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하면서 예수님 코스프레를 좀 하고 산다? 그런 것들에 근거한 ‘나는 믿음 있는 사람’ 라는 확신에 겨워 살아온 날들에 씌운 거품을 비로소 확인한다.

소주잔을 보면 한 잔 하신 아버님께서 흥에 겨워 부르시던 뽕짝 멜로디가 생각난다. 또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라 하시며 부르시던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소심하게 흥얼거리시던 허밍 같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지막 50일을 걱정 대신 사랑으로 더 잘 떠나 보내드릴 걸’ 하는 후회 같은 건 넣어두려 한다. 터무니없는 ‘자기의’의 발로로 발을 동동 구르며 보냈을지언정 아버님과 하늘 아버지 사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 같은 사랑의 교제가 있었을 터이니. 또한 다른 사람들의 믿음 없음에 관한 걱정이랑 집어치우고, 과대 포장된 내 믿음의 자가 평가서나 돌아볼 일이다. 다만, ‘거기서 해처럼 밝게 빛나실’ 아버님이 오늘 더욱 그리운 것이다. 소주잔을 닦다 그 투명한 유리에 어른거리는 아버님의 모습이, 생색내지 않으셔서 더 따스했던 그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다.

입으로는 ‘하늘소망’을 그럴 듯하게 노래하면서도 마음으론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곳이 천국이다. 이 땅에서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손주의 작은 손을 놓자마자, 바로 그 순간 영원한 하늘 아버지의 손을 잡으셨다 생각하니 천국은 얼마나 가까운 곳인지. 우리네 삶과 얼마나 가깝게 붙어있는 곳인지. 아버님과 함께 한 13년 동안 내가 필요한 것을 그렇게 주시기만 하시더니 떠나시면서 가장 귀한 선물을 남겨두고 가셨다. 깨끗하게 닦아놓은 소주잔에 남겨두신 사랑과 선물이 어른거린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