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장례식 이틀 후, 동생 가족과 만나 얘기 나누는 중. 회의주의자 동생이 "결국 천국에 대한 믿음이 또렷해지지 않을까"라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그 말 끝에 "천국? 나는 천국이 믿어지지 않아."라고 내가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이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노가 통곡을 되었다. 예상치 못했지만 내 속에서 나온 말이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진실이다. 천국이 믿어지지 않는다. 부활도 마찬가지다. 훨훨 타는 화장장 불에 태워져 한 줌의 재가 된 엄마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 엄마 몸이 그렇게 내 눈 앞에서 사라졌는데 다시 살아난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천국? 그런 허튼 희망을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말고, 특히 위로의 말로 건네지도 마시라. 당신 엄마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시라. 좋은 곳에 갔다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이라고? 당신 엄마 죽음 앞에서 그 말 그대로 해보시라.

 

진공상태의 경험은 없다. 트라우마로 남은 아버지 죽음의 경험이 아버님과의 이별을 다르게 경험하게 했고, 그로 인해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아버지를 황망히 빼앗기고 보낸 세월과 달랐다. 두려움이나 슬픔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다시 만날 확실한 소망으로 엄마에게 인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고마웠어! 곧 만나!" 특히 '곧 다시 만날 것'에 대한 믿음이 견고 해지는 나날이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지진으로 경험한 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의 한 면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평생 여진의 두려움에 붙들려 살던 내 인생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입에 올리지도 말고, 죽음이나 죽음을 상상하게 하는 아프고 어두운 생각은 떠올리지 말고, 즐겁고 행복한 생각만 하자, 고통의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말자! 오래 붙들었던 무의식적인 신념을 마주할 수도 있게 되었다. 

 

남편도 비슷한 길 위에 섰을 것이다. 아버지, 그 누구도 아닌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어찌 전과 같은 삶을 살며 예전 같이 신앙하고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즈음 남편의 설교 제목이기도 했던 "죽음을 짊어진 삶"은 이때로부터 나를 이끄는 한 문장이 되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책 제목처럼  죽음을 가장 큰 선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브레넌 매닝의 "나는 삶이 가장 두려울 때 죽음도 가장 두렵다"는 말도 조금 알아들어졌다. 오늘 여기를 산다는 것이 현존하는 부활을 믿는 믿음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죽음을 선물로 받아들일 때 'present is preset'이 된다는 것도. 실제로 아버님의 죽음으로 남편은 새로운 길을 갈 용기를 얻었다. 떠나야 할 곳을 떠나기로 결단할 수 있게 되었다. 놀랍고 신비하게도 남편의 결정적인 진로를 열거나 닫는 것은 모두 가까이 일어나는 죽음이었다. 융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치유의 다른 이름은 성장이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치유자가 되는 내적 성장을 멈추지 말아야 함 또한 깊이 새기고 있다. 멈추지 않아야 할 성장의 정점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인생 두 아버지가 인생의 오후 시간에 접어든 내게 따스하게 가르쳐주셨다.

 

이랬던 내 입에서 부활이나 천국 같은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을 때, 함께 앉았던 가족들보다 내가 더 당황했다. 말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어지는 삶이었다. 죽음 이후의 삶이란 것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 고통, 몸이 사라진 엄마의 '현재'가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캄캄한 구멍 속에 빠져 있는 느낌. "우리 엄마 지금 어딨지? 엄마, 엄마 엄마 어딨어?" 몸과 함께 엄마의 존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그 구멍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까만 창 앞에 하염없이 서 있는 순간도 있었다. 엄마와 행복했던 과거는 그리움으로 고통스럽고, 사라진 엄마가 그려지지 않아 고통스럽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과 웃고, 얘기하고, 남편과 걷는 오늘의 기쁨은 미래 어느 순간의 상실의 고통이 될까 하여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과거형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맞다. 쓰는 지금은, 아니 이 며칠은 그 어둔 구덩이 속 느낌은 아니다. (쓰다 보니 알게 된 것, 쓰다 보니 알게 되는 것!) "천국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신념이나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신앙을 부정하는 것도, 믿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동도 아니었다. 감정의 표현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쩌면 "내 앞에서 천국 운운하며 허튼 위로할 생각 하지 마!"라는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하관예배의 설교가 상처가 되었다. 신뢰하는 목사님이고, 좋은 설교였다. 참석한 친구는 "설교가 참 좋았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힘들었다. 엄마를 땅에 묻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유익이라는 말씀을 듣기가 힘들었다. 빈소 없는 이상한 장례식을 치른 이틀을 지나며 몸과 마음에 남은 힘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자꾸 주저앉으려 했다. 다른 힘듦이었다는 것은 쓰다 보니 알겠다.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들을까 먼저 방어막 쳤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장례식에서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찬송을 부르면 걷던 길. 어느 어른의 돌봄도 받지 못하고 혼자 울며 걷던 길, 아버지 친구가 했던 그 말을 누군가 다시 할까 봐. "울지 마라. 너희 아버지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우냐?" 누군가 신앙의 이름으로 허튼 위로를 건네 올까 봐 금기어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정말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그 말로 인해 빼앗긴 나날, 감정은 죄 나쁜 것이라 여겨 내 감정을 미워하고 나를 미워하며 살아온 나날,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버지에게 닿는 유일한 길이라 여겨 종교적 행위 모든 것을 대체하며 살아온 나날을 보상할 자신이 있으면 한 번 지껄여 보라 하고 싶었다. 누군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 친구 목사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나 보다. "아버지 친구 목사님,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차라리 가만히 안아주시지요. 따스한 눈길로 가만히 바라봐 주시는 게 좋았어요."

 

캐시 피터슨의 『애도 수업』에서 위로와 격려로 건넸지만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대놓고 정리했다. 그 첫 번째 말이 "그는 더 좋은 곳에 있어", 두 번째는 "그는 더 좋은 곳에서 더 잘 지낼 거야"이다. 이 좋은 말이 왜 상처가 되는지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모르겠는 분, 아직 엄마나 아버지를 잃어보지 않은 분이라면 내 이 마음을 읽어 보시라. 쓰면서 알게 된 내 마음에 귀 기울여줘 보시라.

 

믿음의 문제라면 그 부활을 믿는 내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두 아버지 죽음의 상실을 짊어지고 처절하게 배운 믿음이다. 부활보다 먼저 나는 죽음을 믿는다. 확신한다. 죽음을 믿는 만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그러니 저의 불신앙을 걱정하진 않으셔도 된다. 건강도 괜찮다. 잘 먹고 잘 웃는다. 잠도 곧 잘 자게 될 것이다. 

 

나는 믿는다.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들의 연결과,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드는 오만불손한 내 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님, 우리 엄마, 한솔이, 박광혜 권사님, 구은회 장로님의

몸, 그 몸들이 다시 사는 것과,

나의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1. BlogIcon ㅅ ㅣㄴ ㅐ 2020.04.04 02:11 신고

    빼앗겼던 들에 찾아온 봄을 같이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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