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우울증 환자 맞나?

 

연구소 카페에 올라온 글의 마지막 문장, "나, 우울증 환자 맞나?" 마음인지 귓가인지 어딘가에서 맴돈다. 그러더니 오늘 저녁엔 "나, 우울증이 아닌 게 맞나?" 하는 이상한 말로 바뀌었다. 잠깐 일어났다 주저앉고, 잠시 힘이 들어갔다 금세 푹 가라앉는다. 아, 그러고 보니 며칠 '긍정'의 말들이 그렇게 거슬렸다. 잘해요, 좋아요, 훌륭해요, 멋져요. 긍정의 캐치볼이 오가는 걸 유난히 견딜 수 없었다. 잠시 혼자인 저녁 시간, 클래식 FM은 전기현의 세음이다. 무기력하게 앉았는데 들리는 기타 연주의 익숙한, 익숙하게 아픈 멜로디. 정태춘 박은옥의 <봉숭아>라니! 떨며 우는 소리 같은 하모니카 소리다. 하모니카 소리에서 가사가 들린다.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 밤이 다하면 질터인데
그리운 내님은 어딜 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 고운 내 님은 어딜 갔나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
고운 내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나소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 님도 돌아오소

 

대학 1학년 1학기에 과대표를 했는데, 선거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선배들이 노래를 시켰다. 그때 부른 노래가 저 <봉숭아>. 앙코르곡으로 역시 정태춘 박은옥의 <사랑하는 이에게>를 불렀다. 그렇게 시작해서 총학 대의원 엠티에 가서 부르고, 도서관 앞 잔디밭에 앉아 짝사랑으로 힘든 친구가 불러달라면 불러주고, 정태춘 박은옥 노래 플레이어가 되었었다. 그 많은 노래 중 가슴에서 나오던 노래가 <봉숭아>였는데, 왜 그리 저 가사가 절절했을까. 친구들도 선배들도 사연 있는 여자의 노래로 들어주었다. 그 시절 나는 아직 실연의 경험도 없던 때였는데. 

 

하모니카 연주가 끝나고 전기현 아저씨의 목소리가 나오도록 꼼짝 않고 들었다. 그 끝에 "나, 우울증 아닌 게 맞아?"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 좀 우울하구나." 내 마음이 알아졌다. 요 며칠 마음이 한없이 협소해지고, 견딜 수 없는 말들이 많았던 건 우울이었구나. 이왕 플레이 버튼 누른 김에 더 서글픈 <봉숭아>도 들어보자. 송소희 노래보다 박은옥 님의 긴장되어 무표정한 표정, 정태춘 님의 깊은 주름이 더 슬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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