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죽음을 토대로 삶을 구축했는데 모를 수가 있겠는가. 태어나보니 목사의 딸이었다. 구원, 십자가, 천국, 부활 같은 교리를 엄마 젖과 함께 받아먹었다. '죽음'은 그런 단어로만 해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밖에는 해석할 수 없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목사인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죽음=부활=천국'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바로 '천국'으로 승화되었다.

 

이 세상을 일찍 떠난 사랑하는 성도들 내가 올 줄 고대하고 있겠네
저희들과 한 소리로 찬송 부르기 전에 먼저 사랑하는 주를 뵈오리

 

이 찬송이 많이 위로가 되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 되었지만 몸으로 사는 것은 쉽운 것이 없었고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죽음이란, 가족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아버지가 안 계시거든요"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고 계속 질문을 받는 것이다. 언제, 왜 돌아가셨냐, 어머니는 어떤 일을 하시냐,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이었다. "편부 편모 가정 손 들어" 학기 초마다 이 폭력적인 질문에 반응해야 하는 것이고. 늙은 엄마가 죽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이며, 어떻게든 동생은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을 등에 지는 것이었다. 

 

죽음은 일단 '부활 신앙'에 맡겨 두고 구질구질한 일상을 살아야 했다. 구질구질 하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 살아 있던 때와 똑같은 나로 살기 위해-보이기 위해- 난 얼마나 밝고 명랑한 것에 집착했는가. 친구들에게 받는 쪽지 편지에는 "신실아, 너는 정말 행복해 보여"란 문장이 흔했다. 구질구질하거나 슬퍼 보이지 않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었다. 아버지 장례식 마치고 첫 등교하던 날, 그날의 나를 잊을 수 없다. 부반장이었고, 까불이였다. 선생님들 흉내 내고 놀리는 게 일이었다. 불과 며칠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없어서, 아버지 없는 아이로 보이기 싫어서, 슬픈 모습 보이기 싫어서 교실에 들어서며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내 인생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페르소나가 장착되는 순간이었다. 밤에는 일기장이 흠뻑 젖도록 울며 아버지를 부르고 썼다. 아버지가 쓰던 만년필을 썼는데, 눈물에 잉크가 번져 페이지마다 볼만 했다.

 

아버지 장례식 중 기억나는 한 장면이다. 장례 행렬를 따라 울며 걷는 내게 아버지 친구가 말씀하셨다. "울지마라. 너희 아버지 천국 가셨다. 좋은 곳에 가셨는데 왜 우느냐" 목사님이셨다. 나는 어렸지만 사리분별은 할 수 있었다. '이게 아버지 잃은 애한테 할 소린가' 싶었다.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어쩌자고 그 말이 머리에서 내려와 가슴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를 데려간 하나님을 원망도 한 번 못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신앙생활 잘해서 나도 죽어서 천국 가야지! 내게 부활 신앙이란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유일한 방법은 천국행 열차를 꼭 잡아 타는 것이었다.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죄악 역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이 노래를 부르며 '다시 내리지 않죠' 부분에서 안도감이 아니라 늘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어쩐지 나는 죄악 역에 억류되어 결국 그 열차 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중간에 '넌 교만하고 죄가 많아서 안 되겠다' 하차 명령을 들을 것만 같았다.

 

열차를 놓치면 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데.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확실한 방법이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내 평생 사도신경을 몇 번이나 외웠을까. 수많은 성경공부로 쌓인 신학적 지식이 있지만, 실존적 부활 신앙은 늘 그 지점을 맴돌고 있었다. 그저 지옥이 두려울 뿐. 지옥이라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 세계라 두려운 것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죽음을 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남기는 그림자를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여겼다. 또래 친구들이 다 어리게 보였다. 아버지 정도 죽어봐야 인생의 깊이를 알지! 중고등, 대학 이후까지 단짝이었던 친구는 나보다 일찍 엄마를 잃었다. 부모의 죽음에 대해 얘기한 적 없지만 그저 통하는 것이 있었다. 죽자고 그 친구와만 붙어 다녔다. 연애든 결혼이든 부모 잃은 상실감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과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죽음을 아는데 죽음을 모르는 사람과는 마음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죽음이 아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흔적을 두려워할 뿐이었는데. 두려움이 클수록 신앙에 집착하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포는 더욱 비합리적이 되어 갔다. 아버지의 죽음은 결국 어떤 환상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누구도 내게 아버지 죽음을 말해주지 않았다. 함께 월남한 친구가 강원도에서 돌아가셨다며 새벽에 서울에 가셨다. "신실이 피아노를 알아보고 오갔다우" 했고, 나는 보조가방을 사다 달라고 했다. 다녀오겠다고 나간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다. 춥다고 모자를 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가셨다. 그 이후 소식은 그냥 분위기를 보고 알았다. 엄마가 서울로 갔고, 교인들이 수요예배 마치고 기도회를 했다. 밤이 깊었을 때 장로님들과 여러 교인들이 집에 와 전화로 부고를 알리며 분주했다. 그 모든 분위기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들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다시 보지 못했다. 장례식에서도 동생에겐 아버지 모습을 보여줬다는데(고개를 돌려 보지 안았다고 했다) 나는 그런 기억도 없다. 아버지는 그냥 사라졌다. 누구도 죽음을 말해주지 않았고 죽은 아버지 몸을 내 눈으로 확인한 바 없다. 그냥 추측했다. 아버지가 죽었나보다. 그렇게 40여 년을 '생각'해왔다.

 

채윤이가 중학교 1학년이던 해, 기도 피정에 가서 아버지 장례식을 하고 왔다. 기도 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생생하게 만났다. 아버지 몸이 없어진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토록 그리웠던 것이 아버지의 몸, 아버지의 품이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주일에 저녁 예배 마칠 때까지 양복을 벗지 않으셨다. 주일 오후, 조금 한가한 시간, 와이셔츠 위에 조끼를 입을 채로 누워 쉬는 아버지 곁으로 가면 팔베개를 내주셨다. 두껍고 든든한 팔이었다. 팔을 베고 누워 아버지 콧구멍을 간지르고 귀를 만지며 놀았다. 넓은 품이었다. 그 품이 평생 그리웠던 것이다.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 품이 그리울수록 신앙에 매달렸던 것이다. 피부에 닿던 사랑을 잃은 상실감을 신앙으로 채웠다. 삶에서는 입에 올릴 수도 없이 두렵고 혐오스러운 것이 죽음이었으니, 빠르게 '천국 소망'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회피하였다. 죽음을 몰랐다. 죽음이란 다름 아닌 몸의 소멸임을 알지 못했다.

  1. BlogIcon pratigya 2020.04.01 01:00 신고

    언니...저는 이제 언니의 힘이 느껴져요...
    정면돌파하시려는 힘이...
    그래서 기대하고 응원해요...

    • BlogIcon larinari 2020.04.01 22:43 신고

      맞아, 처음엔 글이 나를 일으켰지만 지금은 내가 글을 이끌어가고 있어. 분명히 그래. 다 그대 덕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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