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테이블에 놓인 핸드북을 보고 현승가 빵 터졌다.  "으헛, 사모대학? 이건 무슨 대학이야?" 지난 학기에 이어 사모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강사로서 가장 복잡한 자리'라고 표현하곤 한다. 꼬맹이 장애 아이부터, 비장애 아이들, 신자와 비신자, 부모와 아이, 청년과 노인, 무신론자와 가톨릭 신자, 또는 불교신자까지. 다양한 분들 앞에 마이크 들고 서는데 사모님들 앞에서 강의는 마음이 복잡한다. 여러 의미로 복잡한다. 얼마나 복잡했으면 엊그제 있었던 이번 학기 2회차 강의는 전날까지도 강의안을 확정하지 못했었다.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나를 주장할 언어를 가진 내게 ‘사모’는 여느 사모님들과 다르다. ‘글쓰기’라는 일종의 권력을 가진 나는, 글은 커녕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사모님들이 호칭되는 ‘사모’와 다르다는 걸 안다. 아프도록 다르다. 나는 '사모'라고 부르며 나를 통제하려는 후배에게 '사모라고 부르지 마라!' 할 수도 있다. '저 분이 책을 낸 작간데 왜 사모라고 부르고 그래요?' 하며 '사모라 부르지 않는 것'으로 자기 주장을 위해 나를 대상화 할 때는 '사모라 불리든 작가라 불리든 부르는 사람과 나와의 관계다. 낄끼빠빠 해라'고 할 수도 있다. 내겐 이제 그런 힘이 생겼다. 


사모님들이 여러 면에서 힘들지만 목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소수자 스탠스가 그러하듯. 목소리는 낼 수 없지만 은근한 주목(이라 쓰고 '감시'라 읽는다.) 엄청나게 받는다. ‘사모’라는 존재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만큼 사모님을 돕는 것도 없다.  사랑해서 결혼한 남자가 목사니, 그의 삶의 동반자로 함께 걸으며 자기 삶을 살도록 신경 꺼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여자가 남편의 직업 때문에 그렇듯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단 말인가.

(자주 했던 얘기지만) 주부수영반에 들었던 적이 있다. 거기선 일반적 호칭이 ‘형님’이고, 1번 형님, 3번 형님 등으로 불린다. (번호는 수영 잘하는 순서, 말하자면 줄번호이다.) 수영 마치고 오래오래 시우나 하고, 맛집 가고 하는 형님들의 에프터엔 나도 함께 하지 못했지만. 유독 혼자 다니는 한 분이 계셨다. 어느 날 2번 정도 되는 형님께서 내게 엄청난 비밀 공유하신단 태도로 귓속말을 주셨다. “야, 저기 지금 나가는 평영 잘하는 여자 있지? 걔 목사 사모래” 헉! 목사 사모가 왜요? 나도 커밍아웃 해야 하나, 잠시 심장이 쫄깃 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까지도 목사 사모에 알 수 없는 무엇을 덧씌우고 바라본다. 그러니 사모님들께 당장 ‘자기 자신이 되세요! 사람들의 기대에 휘둘리지 마세요!’라 말할 수 없다. 마치 그런 주문 같이 느껴져서다. 신혼 초에 시어머니의 과한 요구에 거절하지 못하고 돌아와 괴로워 하는 내게 남편이 하던 말이 있다. “그렇게 싫으면 어머니한테 싫다고 하지 그랬어?” 내가 그 말 할 힘이 있었으면 이제 와 이러겠냐고! (그 힘을 기르기 위해 20년 수련을 해왔다.)

사모님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하는 자체가 사모를 어떤 프레임에 가두는 것이라 여겨 불편하지만 이것조차 힘이 되는 분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이런 곳에 찾아올 수 있은 분은 그나마 여건이 나은 분들이다. 이 지난한 사모의 일상을 한 방에 뚫어줄 무엇을 기대하셨을지 모르나 내겐 그런 것도 없다. 강의란 이름으로 아내, 엄마, 사모로서 흠결 많은 나를 보여 드리는 것. 그나마 목회자 아내로서 형편이 나은 나, 이런 곳을 찾을 수 있는 분들도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일은 아니지 않나 싶다가도 그나마 이렇듯 연결되는 것이 어딘가, 하기도 한다.




사모대학 강의 다음 날엔 사모인 친구를 만나러 다녀왔다. 주어진 몇 시간, 시간 가는 것 아까워 마음 졸이며 수다를 떤다. 명목은 김치 가지러. 젊어서부터 사모란 이름으로 제 교회에 엄마 노릇에 지친 친구의 김치를 나는 또 얻어다 먹는다. 김치는 맛있다. (그 맛있는 김치에 먹으려고 일찍부터 무국을 끓여 놓고 가는 부지런한 나) 가족들도 M이모 김치야? 와와!! 겨우내 김치찜 하고 김치찌개 끓일 때마다 친구를 생각하고, 친구의 삶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올라오는 길에 우리들의 20대를 얘기했다. 고속도로 옆 산들은 안개에 휩싸여 묘한 분위기였다. "우리의 20대 안개 속 같았어" 그렇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 같았지. 보이지 않는 한 발 앞이 나름 희망이기도 했는데. 제각각  이런 모양의 구부러진 길을 걷고 있다. M과 나, 그리고 사모가 된 두 언니들 생각에 늘 부채감 지고 있는 H. 우리의 노년이 지금보다 자유롭고 평화롭기를 마음으로 빌며 운전했다. 이번 주 만난 사모님들의 나름대로 구부러진(曲) 길 위에도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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