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윤이 아홉 번째 생일이 돌아왔습니다.
아빠가 없는 관계로 생일축하와 관련된 모든 세러모니를 주말로 연기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그래도 오래 전부터 약속해둔 생일선물은 당일에 받고 싶어했기에 이마트에 갔습니다.

오래 전부터 찍어둔 생일선물은 월.E 피겨였습니다.
굳이 채윤이 생일선물이 아니어도 엄마가 갖고 싶었던 것이기도 해서 조금만 졸라도 사줬을텐데 언젠가 이마트 가서 저걸 보고는 사고 싶어하는 걸 '생일선물로 사줄께' 했더니 순순히 받아들였었습니다.

엄마 기압이 쬐께 저기압인 관계로 생일 아침에도 뭔가 분위기가 화창하지는 않아서 채윤이 좋아 죽겠는데도 별 요란도 떨지 않았습니다. 미역국에 알타리 김치 정도로 식사를 하면서 FM 라디오에 김광민의 <학교 가는 길>을 생일축하 노래로 신청해 달라는 것 어떻게 됐냐고 합니다. 가슴이 뜨끔! 미리 신청해 놨어야 하는데... 
미안한 마음에 오히려 더 무뚝뚝해져서 별다른 말도 못했습니다.

학교 갔다 와서는 이마트에 월.E를 사러 갔습니다. 그 와중에 현승이는 같이 가지 않겠답니다. 이유인즉,
누나 생일이니까 분명히 누나만 선물 사줄거고, 자기도 따라가면 분명히 뭔가 사고 싶을텐데 엄마는 분명히 안 사줄거고, 그러면 자기가 짜증을 낼거고, 그러면 엄마가 속상해서 화를 낼거고.... 이래서 자기는 안가겠답니다.ㅜㅜ

월.E 피겨가 크기별로 여러 종유가 있었는데 채윤이가 갖고 싶었던 건 제일 큰 거. 
사실 저렇게 작은 놈이 귀엽기도 했거니와 가격 차이도 많이 나서 조금 구슬렀더니 좋아라 하고 저 놈을 집어 들었습니다. 현승이는 내복을 한 벌 사야했기에 '자~ 내복 원하는 거 골라' 했더니 입이 찢어져 가지고 슈팅 바쿠간 내복을 골라 들고 쇼핑카트에도 안 넣고 손에 들고 좋아합니다.

 요즘 채윤이 친구들 생일파티의 대세는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먹고 바로 노래방 가서 두 시간 놀고 오는 것입니다. 자기도 토요일에 그거 할 수 없냐고 묻는데 물으면서도 우리 엄마가 대세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기대도 안하는 듯 합니다. 대신 아빠 오는 금요일에 채윤이가 좋아하는 생선초밥 많이 있는 식당에 가서 채윤이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축하하기로 했습니다. 축하는 원래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받는 거라고 했지요.
채윤이가 이마트만 가면 생선초밥 파는 곳을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는데 오늘은 '누나! 초밥' 하는 현승이에게 '괜찮아. 금요일날 아빠 오면 문화상품권 갖구ㅋㅋ 초밥 많이 있는 식당에 갈거니까 오늘은 참을 수 있어' 하고 유유히 지나쳤습니다.

저 조그만 선물에 좋아서 잠들기 전까지 만지작거리다 '이걸 어디 두지?' 하면서 여기 놨다 저기 놨다 했습니다.
그러고 잠든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합니다. 기아 달린 뽀대나는 자전거, 닌텐도, 핸드폰.... 사실 채윤이가 많이 갖고 싶어하는 건 그런 것들인데 생일선물이나 어린이날 선물로 그런 걸 요구하지 않습니다. 않는 건지 못하는 건지.... 요구한다고 사줄 수도 없지만 아직은 저렇게 작지만 의미있는(함께 월.E 를 보고난 이후에 우리 끼리 얼마나 많은 감상을 나누고 아직도 거기 나온 대사를 읊조리고, 월.E와 이브의 사랑을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영화 한 편으로 공유하는 추억이 얼마나 많은지요) 선물에 감사하는 채윤이였으면 좋겠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 세상이 가르쳐주는 대로 비싼 선물이 좋은 선물이라는 공식을 자신도 모르게 배워가기도 하겠지만요....

그래도 생일에 뭣 하나 변변히 해준 게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해서 잠이 오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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