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서 다른 사람 얘기하듯 말하는데 그게 딱 자신의 얘기인 것을 감으로 알겠는 때가 있다. ‘아니야, 아닐거야. 정말 다른 사람 얘기일거야’라고 애써 믿고 싶었는데 결국 그것이 그 애의 일이라는 것이다. 지난주에 통화할 때 K는 ‘언니 제 학교 친구 얘긴데요...그 애 교회도 나름대로 열심히 다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임신을 하고, 수술을 했어요. 죄의식 때문에 교회도 못 나가겠다 하고 너무 힘들어 하는데 어떻게 도와줘야 할 지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해줘야 하나요?’ 하고 말했다. 어쩌면 핸드폰의 통화품질 때문인가도 했었지만 그 목소리에 뭔지 모를 긴장과 떨림이 베여 있었다. 결국 오늘 만나서 얘기하면서 그 애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여울 정도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내게는 청년부 후배로 보다는 몇 년 전 중등부 교사를 할 때 중등부 찬양팀에서 봉사하던 수줍음 많던 여중생의 모습으로 더 각인 되어 있는 아이다.

대학 때 친구 Y를 따라서 산부인과를 갔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잠시 우리 교회를 나오기도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면서 교회와는 발을 끊었고, 유일하게 나에게만 연락을 했었다. 가끔씩 만나도 자기 속내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곤 했었다. 하긴 속내랄 것도 없지. 속내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삶을 마구 쏟아놓곤 했었으니까. 그 친구에게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하는 얘기가 내게는 사사건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여러 남자와 동시다발적으로 교제를 하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육체관계는 기본적이 것으로 보였었다. 때문에 그 친구가 임신을 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병원에 중절수술을 하러 가는 파트너로 내가 선택된 것이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지금 돌이켜봐도 참으로 당혹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이 세대에 정말 비일비재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교회에서 너무 ‘성’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고들 한다. 너무 터부시 하면서 교육은커녕 대화의 주제가 되지도 못하니 성은 크리스챤 청년들의 사각지대가 되고 있다고들 한다. 그런 것 같다. 어른들이 너무들 안 가르쳐 주시는 것 같다. 청년들에게는 이성교제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모두에게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성에 대해서 말이다. 교역자든 선배든 누구하나 잘 가르쳐주는 이 없는 것 같다. 각개전투 하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는 신실하게 훈련받고 봉사하는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인 것 같은데, 그런 청년이 어쩌다 보면 혼전임신을 하고 있는 상황이 각개전투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단지 교회에서 우리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들 안에 있는 다양한 성적인 문제들에 대한 온전한 원인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통제할 수도,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소위 말하는 성인이 아닌가? 그렇다. 책.임.전.가.를 할 수는 없다.

K의 얘기를 듣고 도움을 받아 볼까 해서 데이트에 관한 책을 몇 권 훑어보았다. ‘남성들은 여성보다 더 충동적이니 여성들이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남성들은 시각적 자극에 약하기 때문에 자매들은 데이트 할 때 노출이 심해서 자극할 수 있는 의상을 피해야 한다’ 이런 얘기들이 여러 번 눈에 띈다. 저자가 모두 남성이었다. 비슷한 표현들을 계속 보면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K의 얘기를 들으면서 느꼈던 느낌이기도 하다. ‘나는 안 된다고 했는데....나는 정말 안 될 것 같았는데....오빠가....’ 결국 책.임.전.가.다.

자매들이 옷을 야하게 입어서가 아니라, 오빠가 너무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결과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 우리들 성문제의 열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것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다’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나의 연애와 그 연애의 실패 경험으로 얻은 결론은 이것이다. 솔직해야 한다. 책임전가할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말고 정직해야 한다. 정직한 대화가 없으면 사랑하는 사람끼리 몸이 원하는 방식으로 진도를 나가게 마련인 것 같다. ‘나는 당신을 만날 때 손을 잡고 싶고 뽀뽀를 하고 싶다’ 라고 상대방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정직하게 인정하고 말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쉽게 건강한 방식들이 찾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그 감정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선배에게 들었던 잊혀 지지 않는 얘기 하나. 남자친구와 데이트할 때마다 스킨쉽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시도한 방법이라고 했다. 둘이 데이트하기 위해서 만나자 마자 그 날의 데이트를 위해서 함께 기도한단다. 기도하되 구체적으로 스킨쉽을 잘 제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단다. 참 아름다운 장면일 것 같다. 그 어떤 낭만적인 데이트의 모습보다 아름답지 않은가? 이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상대방에게도 정직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스스로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지고자 하며 무엇보다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다시 내게 데이트의 기회가 온다면 이렇게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K를 위해서 기도한다. 어서 빨리 죄책감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한다. 단지 혼전 임신을 하고 낙태를 했다는 것만을 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경적으로 데이트하는 것을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한다. 미혼의 날 동안 성적인 외로움으로 인해 삶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이성에 대해서 맑은 눈을 잃지 않기를 위해서.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나의 배우자 역시 그렇게 맑은 눈으로 젊음의 날을 지켜가고 있기를..... 그 배우자를 올해가 가기 전에 만나기를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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