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일주일 후가 어버이날이다. 결혼하고 맞은 첫 어버이날에 양가 부모님께 선물 대신 현금 봉투를 드렸다. 엄마는 "니가 돈이 어딨다고!" 하며 봉투를 되돌려주었다. 이후로도 어버이날이든 생신이든 "됐다, 필요한 것 없다." 하곤 했다. 넙죽 받아 누리지 못하는 엄마가 싫고, 늘 마음이 아팠다. 밖에서 식사하자고 약속해 놓고 모시러 가면 어느새 밥을 차려놓고는 "그냥 집이서 먹자."며 기운을 뺐다. 어떤 특별한 '날'들이 점점 더 아무렇지 않은 날이 되었다. 엄마와 나 사이에는 그렇게 되었다.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다. 챙겨드리면 고마워하시고, 그렇지 않아도 무신경하셨다. 그러니 어버이날이 왔다고 해서 더 슬프거나 그리울 일은 아니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어버이날이라 힘들겠다"라는 말도 들었지만, "글쎄, 그다지......" 하고 말았다.

 

어버이날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선물을 챙기는 지인들을 보며 야릇해졌다. 마음 밑바닥에서 출렁거리는 슬픔은 여전하다. 어버이날이라고 더한 것은 아니다.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가 계실 때도 어버이날과 아닌 날의 차이는 없었으니까. 어버이날에 부모님과 맛난 음식 먹으러 가는 친구가 부러운 건 아닌데,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도 카네이션 달아줄 엄마가 있으면 좋겠네." 이런 생각까지 나가지도 않는다. 슬픔의 강물이 더 출렁거리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작은 일렁임조차 멈춰버리는 듯, 덤덤하고 고요하다. 다만 야릇하다. "그날은 부모님 식사하기로 한 날이라 안 되겠는데요." 이 사소한 얘기를 못 들은 척하고 싶은 야릇함이다. 야릇함은 무기력이 되고 무기력이 우울이 되었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글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는 며칠이었다.

 

주말을 지내고 남편이 엄마가 있는(있다니? 엄마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추모공원에 가자고 했다. 어버이날이 의미 없는 것처럼, 엄마가 묻힌 손바닥만 한 공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조카 지희가 아이들 데리고 다녀왔다면 전화를 해왔다. 공원 측에서 꽃 가져다 놓지 말라는 말에 그냥 갔는데, 가져다 놓은 사람들이 있더라고. 아이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돌을 주워다 왕할머니 비석 앞에 놓았다고 했다. 어린 증손주들이 찾아가 할머니를 기억하고 왔다니 어쩐지 거기 엄마가 있는 것 같았다. 딱딱하던 마음에 균열이 생기고, 출렁출렁 다시 슬픔이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눈물이 났다. 비로소 다시 눈물이 났다. 고모, 실감이 나지 않아요, 고모도 그래...... 살아계실 때 더 많이 가볼 걸, 설날에 늦게라도 갈 걸 그랬어요...... 특별하지 않는 말을 주고받으며 함께 울었다. 

 

집에 있던 카네이션 화분에서 한 송이를 잘라내 들고 엄마에게 갔다. 전날 아이들이 가져다 놓은 흰돌과 나뭇가지가 비석 옆에 놓여 있다. 비석과 크기가 딱 맞는 작은 카네이션 한 송이를 나란히 두었다. 비석의 낯선 글자를 읽어본다. 

 

권사 이옥금

1925. 12. 12. 출생 

2020. 03. 11. 소천

 

조카 말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옥금 권사님의 출생과 '소천'이라니. "우리 엄마 어디 갔지? 엄마, 엄마 어딨어?" 어렸을 적부터 수도 없이 불렀을 '엄마', 물었던 질문 '엄마 어디야?'. 어버이날에 선물 받아야 할 엄마가, 빕스에 가서 새우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먹어야 할 엄마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추모공원에서 나와 강화도의 카페로 갔다. C. 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을 펼쳐 읽었다. 아내를 잃고 쓴 애도 일기이다. 세계적인 문호도, 사상가도,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한 중학생도, 50대 그냥 그런 여자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상실을 통과하며 쓰는 글에는 같은 질문이 담긴다. 

 

사람들은 이제 H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제 평화롭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 걸까? (중략) 왜 사람들은 모든 괴로움이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다고 확신하는 걸까? 기독교 세계에서도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고 동방에서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가 '안식'한다고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다른 건 다 제쳐 두더라도, 남은 사람들을 이토록 괴롭게 하는 이별이 떠나는 사람에게는 왜 고통스럽지 않단 말인가?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 품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하나님 품 안에 있었으며 나는 하나님의 손이 그녀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봐 오지 않았던가. 우리가 육신을 벗고 나면 하나님이 갑자기 더 다정하게 대해 주시기라도 한단 말인가? (중략) 자, 회피한다고 얻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고통 속에 있으며 이를 회피할 수 없다. 

 

회피해서는 안 되는, 회피할 수 없는 고통이다. 나의 애도일기를 구독하는 이들, 가까이서 나를 지켜보는 벗들에게 각성이 일어나고 있다. 부모님께 더 따스하게 대하겠다 결심하고, 전화를 한 번 더 한다.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살아계실 때 잘해야겠다 결심들을 한다. 좋은 생각이다. 내 상실감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며 얻은 통찰이리라. 우리 엄마의 죽음이 어떤 엄마에게 따뜻한 전화 한 통이 된다. 그 엄마는 '이 딸이 왜 이러지. 이쯤이면 짜증 내며 전화 끊을 때가 됐는데, 어찌 이렇게 가만히 오래오래 얘기를 들어 주지?' 싶을지 모른다. 이 역시 야릇한 느낌으로 온다. 내 엄마의 죽음, 이 어마어마한 상실이 누군가에게 전화 통화 한 번이구나. 묘하게 억장이 무너진다. 하지만 그 결심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고소하다. 금세 잊을 것이다. 다시 전처럼 귀찮아하고 짜증도 낼 것이다. "같은 얘기 좀 그만 하라" 타박할 것이다. 그러다 엄마가 떠난 후에 후회할 것이다. 내가 그러했고, 지금 이러고 있는 것처럼.

 

슬픔은 글로 배울 수 없다. 상실과 애도는 몸으로, 물리적인 시간을 통과하며 겪고 배우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 죽음으로 평생 엄마 잃을 날을 예습했지만 소용없는 것이었다. 오롯이 통과해야 하는 시간, 슬픔을 위해 내어 주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뱃속 깊은 곳에 슬픔이 출렁이고 있는데 "아직도냐, 이제 그만 잊어라"는 말을 들을까 자꾸 숨기게 된다. 틀어막게 된다. 흐르게 하지 못하고 댐을 세워 멈추려 하는 나를 본다. 시간을 단축시켜야 한다는 강박이다. 슬픔의 시간은 단축시킬수록 좋다고 누가 강요하고 있는가. 저요! 내가 나를 지겨워한다. 내 글에 질린다. 

 

장례식 후 바로 읽었던 책 『애도 수업』에 이런 말이 나온다. "명절과 기념일들이 다가올 때마다 비참하다. 어떤 기념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 말이 싫었다. 애도도 정도껏 해야지! 마음에서 마구 밀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이 문장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모른다. 나는 이 정도까지 하지는 말자. 명절이나 기념일에 휘둘리지 말자. 결국 엄마 떠난 첫 어버이날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함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댐을 세우다 어정쩡하게 우울과 무기력의 어버이날을 보내고 말았다. 이조차도 어쩔 수 없다. 나라는 인간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니까. 댐을 쌓아 감정을 막았다, 어느 날 수문을 죄 열어 쏟아냈다, 다시 막기도. 나도 모르는 구멍이 생겨 줄줄 새기도 한다. 모든 것이 내가 슬픔을 마주하는 고유한 방식이다. 슬픔을 위한 시간을 채우는 나만의 방법이다. 그대로 내 존재의 모양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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