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치른 채윤이 어제는 머리에 염색을 하고, 오늘은 교회 언니와 홍대 노래방에 갔다가 빙수를 먹고 온다며 신이 났더랍니다. 살짝 오렌지빛이 날락 말락 하는 염색 머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매직기로 정성스레 쓰다듬고, 엄마가 미국에서 사다 준 수트를 입고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찬양팀 준비하러 나갔습니다. 나가서 10분 만에 전화. "엄마, 그런데 나 돈이 하나도 없어. 놀아야 하는데" 아빠 만나서 용돈 받으라고 했더니 그러겠노라고. 잠시 후 남편에게서 메시지 "채윤이가 용돈 달라고 문자 왔어. 얼마 줄까? 했더니, 만원 달래" 에고 개념없고 가엾은 녀석. 기껏 부르는 게 만 원이냐? 그걸로 노래방 가고 빙수 먹고 홍대 앞에서 머리끈이랑 귀걸이 살 수 있겄어?


중학교 가서 벌써 여섯 번째 시험을 치렀습니다. 시험 성적은 거기서 거기라도 시험을 대하는채윤이의 자세는 제법 자기주도적이고 성실해졌습니다. 피아노 전공을 하면서 평소에 공부도 꾸준히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디다. 한 시간 거리 학교를 지하철로 오갑니다. 레슨이 있는 날에는 잠실을 찍고 다시 집에 오는 긴 여정이구요. 친구들은 그러고도 밤에 과외공부하고 12시, 1시까지 공부하고 연습을 하고 잔다는데.... 채윤이는 참 건강한 청소년이라 학교 갔다 오면 연습 깔짝거리고 밥 먹고 내일을 위해서 일찍 자는 일상을 살았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실기나 향상연주회 시즌이 되면 선생님 스튜디오와 교회 빈 공간을 메뚜기처럼 찾아다니며 열심히 합니다. 기특합니다. 실기가 마치고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나름대로 계획을 짜고 공부합니다.


기말고사 전에 엄마가 미국에 가 있었더니 아빠의 도움을 받아서 수학공부를 하고, 영어는 인강을 열심히 듣고, 국어는 삼촌한테 가서 한 번 배우고 알아서 잘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암기과목은 시험기간 당일치기고 몰아서 외우고 시험 보자마자 다 까먹는 방식으로 효율적으로 했고요. 이 모든 것을 점점 자발적으로, 주도적으로 해나가니 눈물나게 고맙고 대견합니다. 아, 물론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정상적이라면 채윤이 정도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 상위권에 있어야 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헌데 애들을 인간이 아닌 성적제조기로 만들어서 학원으로 과외로 잠을 줄이는 공부로 쥐어 짜다보니 영어, 수학 점수 평균이 88점 이상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피아노 실기도 마찬가지. 채윤의 정도의 음악성에 열심히 레슨받고 연습하면 실기 상위권에 있어야 할 텐데요. 아이들이 교수님 레슨에, 연습기계가 되어가니 보통의 가정경제에서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자고 쉴 시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채윤이는 어떻게 따라잡을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실기나 필기나 직선 위에 줄을 세워놓는 평가라서 그 줄에서 뒤쪽에 있는 채윤이를 보면서 속이 쓰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이를 더 닦달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지금보다 더 많이 놀게 하고 싶습니다. 헌데 대한민국 중딩이 어디 제대로 놀 데가 있어야지요. 주일에 중등부 예배 마치고 찬양팀 언니 오빠들과 떡볶이 먹고 한강 가서 사진 찍고 놀았다는 말이 반갑습니다. 되든 안 되든 중등부 예배 반주를 하면서 즐기고 누리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맙구요.


시험이 놀짱 채윤이가 어디 가질 않아서 시험공부를 여전히 놀이하듯 하는 것이 재밌습니다. 채윤이에게 공부는 공부가 아닌 듯. 그야말로 시험공부를 통해서 교양을 쌓아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문자에 관련된 능력이 취약해서 책도 잘 안 읽고, 보유하고 있는 단어 수도 협소한 채윤이에게 시험공부가 얼마나 유익한지요. '모골이 송연하다' '귀추가 주목되다' '된서리를 맞다' 등등 지성에 있어서 소영이 등급인 채윤이가 어디서 이런 고급진 말을 배우겠냐는 거지요. "아~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 하면서 국어시험 공부를 하는데 얼마나 뿌듯한지요. 그러고 보니, 지난 시험 등에서는 도덕시험을 봐주면서 '자아상' 이런 주제를 설명하며 깊을 얘기를 나눴네요. 가정과목에서는 '사춘기의 변화' 부분을 봐주면서 신체적 정서적인 변화 등에 채윤이 자신의 어려움을 대입해가며 딥토킹했구요. (시험 필요하네요!ㅋㅋ 내가 보는 거 아니니까)


채윤이가 시험공부 하고 거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메모장 여백에 아빠가 설교 구상한 것을 적어놓은 모양입니다. 아침에 일어난 채윤이가 빵터져서는 "엄마, 아빠 너무 귀여워. 내가 시험공부 한 거에 설교준비 했어. 나 이거 지하철에서 외워야 하는데 갖고 가도 돼?" 합니다. 학교에 가서 친구가 이걸 빌려 달래서 줬더니 "야, 밑에 있는 거 뭐야? 이것도 외워야 해?" 했다는. 시험보는 내내 거실에 뻗치고 앉아서 온 집안을 시험기간 모드로 만드는 바람에 날도 더운데 불쾌지수를 더욱 상승시켰던 채윤이. 열심히 했지만 그다지 만족스러운 점수는 못 받고 한 학기를 마쳤습니다. 그래도 잘했다. 우리 소영이, 아니 아니 채윤이! 엄마가 돈 열심히 모아서 꼭 쌍수 해줄게!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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