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죽음은 아직 철없는 아이들을 두고 예고없이 훌쩍 아버지가 떠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가난과, 외로움과, 서러움 같은 것을 쓰나미처럼 몰고왔다.
사춘기에 막 접어든 내가 '와, 새로 지은 좋은 집에서 이렇게 행복하게 살다니....'라고 일기를 쓴 지
딱 보름만에 찾아온 일이었다.
'이번에 서울가면 신실이 피아노를 알아보고 오겠다'며 또 예쁜 보조가방을 사다준다고 약속한 아버지가
새벽밥을 드시고 멋진 털모자를 쓰고 나간 그 길이 마지막이 되는 그런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커다란 고통 하나가 가슴에 자리를 잡고,
그 고통은 청소년기 내내 부끄러움이 되고, 콤플렉스가 되고, 서러움이 되었다.


그 고통을 넘어서 나는 자랐다.
그 고통 때문에 인생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좀더 빨리 배우고 (적어도 외적으로는) 단단해지고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자라가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넘어서, 아버지 없는 아이로 자라면서 내가 아무리 얻은 게 많다한들 어찌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겠는가. 아버지의 부재를 넘어 더 어른스러워질수록 죽음은 더 무섭고, 예기치 않게 찾아와 많은 것을 앗아가는 두려운, 너무나 두려운 것이 되고 있었다.


죽음 너머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머리의 고백일 뿐, 나는 평생 엄마도 죽을 지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이유없는 공포와 슬픔에 떨곤 했었다.
은하철도 999에서 기차가 정차한 어느 별은 화석이 되게 하는 검은 구름이 있는 곳이었다.
검은 구름이 예고없이 덮치면 그 그림자 안의 모든 생물은 화석이 되는 것이다.
내게 죽음은 그렇게 예고없이 들이닥쳐 속수무책으로 점령당하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 가장 그리운 이름 아버지.


지난 2년여, 아니 가깝게는 최근 몇 개월 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실패, 고통, 기도해도 억울함에 놓아두시며 기도할수록 더 진창으로 빠져드는 느낌, 선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악한 사람들이 더 높은 곳으로 가서 약한 자들을 더 큰 고통에 밀어넣는 현실.
그 현실을 뼛 속 깊이 느끼며 그 분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하는 동안 그 분이 내게 말씀하셨다.
인생의 어두운 면,
실패,
부조리,
눈 앞에서 거절되는 오랜 기도,
들을 통합하지 못하면 온전한 진리가 아니라고.
부활의 영광은 지난한 십자가의 고통 너머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들어 가고 있었다.
죽음은 삶과 가장 확실하게 밀착된 것 또한.


긴 터널의 끝은 '사랑'이었다.
삶과 죽음, 부활과 십자가, 응답되어 간증거리가 되는 기도와 거절된 기도, 성공과 실패....
이 모든 것을 두려움 없이 아우르게 하는 것은 그 분의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일상을 사는 방식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치유'라 부르는 결혼이 내 삶에 '아버님'이라는 '아버지'와 비슷한 호칭의 어른 한 분을 선물로 주었다.
아버님은 아버님이었다.
남편의 아버지인 아버님은 소심하시고 말이 없지만 자상하시고 일을 하지 않고 지내신 지 오래 된 그런
분이었다. 채윤이와 현승이를 손수 키워주신 분이다.
한 집에서 2년 여를 살았고, 현관을 마주보는 집에서 3년 정도 살았나보다.
시간이 많으시고 자상하시고 건강하시고 손재주가 많으신 분이라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도움이 되는
아버님이었다. 매주 강의를 가는 화요일마다 집에 오셔서 현승이 유치원에서 찾아주시고, 두 녀석을 데려다
간식 챙겨주시고 봐주시다 가시곤 하셨다. 아버님이 가시고 나면 냉장고 한켠에 검은 비닐 봉지로 싸인
병이 하나 씩 있었는데 막걸리 병이었다. 심심하고 출출하시면 막걸리를 하나 사셔서 드시면서 오후 시간
보내시는데 전도사인 아들에게 누가 될세라 검은 비닐로 남은 막걸리를 꽁꽁 싸서 숨겨두고 가신 거였다.
약주를 하시면 가끔 전화를 하셔어 '에미야,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씀도 하시고 문자도 보내셨다.


나는 그런 아버님이 고마워 우리끼리 하고픈 여행에 부모님을 모시고 가고,
흥행작 영화를 예매해서 보여드리고,
생신 때면 정성껏 생신상을 차려드리고,
신앙 좋은 며느리라 눈치보시는 아버님께 직접 참이슬을 사다드리고,
인터넷뱅킹을 가르쳐 드리고,
운전을 해드리고....
나름대로 아주 아주 많은 것을 해드린다며 자부(自負하는 자부(子婦)였다.


아버님이니까.
유난히 착하시고 우리 아이들을 키워주신 고마운 아버님이니까.


건강하시던 아버님이 위암 말기에 여기 저기 전이가 많이 되셨다는 진단을 받으신 지 한 달이 좀 더 됐다.
처음 진단을 받으실 때 6개월이라 했었는데 이번 주에는 한 달이란다.
어제는 노인병원 호스피스 병동으로 입원을 하셨다.
아버님의 죽음을 맞닥뜨려야 했을 때 나는 수십 년 교회 다니셨지만 아버님이 구원을 얻으실까?
하는 종교적인 질문으로 조바심을 냈었다.
아버님을 생각하며 기도할수록 내게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이다.
구원은 내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랑이다.


숙제에 늘 할 일이 많은 아이들을 닥달해서 가능한 저녁에는 아버님을 뵈러 간다.
다행히 두 녀석도 그 일을 즐거워한다. 힘들고 피곤한 일일텐데.
하루하루 눈에 띄게 쇠약해지시는 아버님을 뵈면서 비로소 나는 다시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아버지을 사랑하는 이상 이 죽음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버님지 생명이 사그러드시는 걸 직면해야 하고, 헤어져 다시는 볼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 낮에 병원에서 아버님과 함께 긴 시간을 보냈다.
어젯밤에 갔을 때 채윤이가' 할아버지 손톱이 너무 길어요' 하던 말이 생각나 손톱깎기를 챙겨갔다.
손톱을 깎아드리고, 아버님의 손을 꼭 잡아 드리고, 쓰다듬어 드리고 아낌없이 사랑을 표현했다.
그럴 수 있는 내 자신을 대견해하다보니 이 분이 아버님이 아니다.
아버지다. 남편의 아버지가 아니라 내 아버지셨던 것이다.


내가 처음 아버지를 죽음에게 뺏길 때는 예고없이 덮쳐와서 속수무책으로 빼앗기고 그 슬픔과 상처
가누지 못해 오랜 세월 길을 잃고 헤맸는데.
이제 이 아버지의 죽음을 아버지보다 내가 먼저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하늘 아버지께 감사히 맡길 마음이 조금 생겼났다.
그건 더 이상 죽음으로 인한 헤어짐의 고통을 차단하지 않겠다는 의미하기도 한다.
죽음같은 잠을 주무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마음이 찢어지는 슬픔을 회피하지 않는다.


어쩌다 이 분이 내 아버지가 되셨을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분명 아버님이었는데 어쩌다 아버지가 되셨을까?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죽음으로 빼앗긴 나.
40이 넘어 두 번째 아버지를 죽음에 내어드린다.
준비할 시간, 사랑할 시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감사하다.
이런 며느리를 두신 우리 아버지, 정말 행복한 분이다.
내가 참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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