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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정

어쩌다 오십

larinari 2017.12.31 09:28




"엄마, 이틀 남았어. 40대를 마지막으로 즐겨. 이틀 후에 50살 되는 거 알지? 50은 반백이야. 백 살의 반이라구" 토요일 할 일 없이 빈둥거리던 아들 놈이 기껏 찾아내 떠벌이는 말이다. (굳이 일깨워주지 않아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이 놈아!) 어쩌다 오십이다. 나이에 부끄럽지 않게 한껏 늙은 얼굴이다. 화장 하려고 거울 앞에 앉으면 어떤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든 민망함이 앞선다. 연세 드신 분들을 만나러 간다면 '어린 것이 버릇 없이 저렇게 주름 자글자글 마음껏 늙어 가지고 다녀!' 하실 것 같고. 젊은이들 만나러 가는 길에는 '어머, 이렇게 연로하신 분이 무슨 연애 강의요?!' 하지 않을까 싶고. 


얼굴이 문제가 아니다. 반백의 나이에 부응하여 '오십견' 또한 찾아와 주셨다. 내가 강의도 잘하고 음식도 잘하고 찬양 인도도 잘하는데 딱 하나 등을 못 긁는다. 아, 사실 옷도 잘 못 입고, 머리도 못 묶는다. 오십견 증상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와 1도 상관 없을 것 같은 말이 오십견이었다. 일단 무지 나이를 많이 먹었는데 운동은 전혀 안 하고, 폐쇄적인 어떤 사람들이 걸리는 것이려니. 어깨 관절 각도가 조금만 커져도 '아야아야아야' 비명을 지르게 되는데 얼마나 엄살 같은지 식구들의 놀림꺼리이다. 


영적 사춘기와 함께 중년 앓이를 남보다 이르게 치룬 덕으로 일찌감치 이 말씀을 알아듣고 마음에 간직하고 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일기장과 블로그를 더듬어 보니 2009년, 2012(click), 2014(click)년 한 번씩 이 말씀을 깊이 품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성가대 지휘를 내려 놓으며, 음악치료를 접으며, 무엇보다 삶의 계획의 주도권을 내려놓아야 할 때마다 묵상한 말씀이다. 오십 고개를 넘어가며 다시 보는 이 말씀에서 '늙음'이 더는 상징이 아니다. 늙음 그 자체이다. 비움, 내려놓음 이런 관념이 아니다. 


10여 년 수영을 하다 그만둔 지 1년이 넘는데, 그 사이 오십견이 왔다. 치료는 운동 밖에 없다는데 그 어떤 운동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재활치료 한다는 마음으로 수영장엘 가자, 싶어 용기를 냈다. 빠르게 왔다갔다 하진 못하겠으니 중급 정도에서 천천히 놀아봐야지, 싶었다.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왼팔 젓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겨우 살살 평영을 할 수 있을 정도. 할머니 한 분이 세월아 네월아 삐뚤삐뚤 자유형을 하다, 걷다 하시는 초급 레인으로 갔다. 나도 그냥 세월아 네월아 한 팔로 되는대로 왔다갔다 했다. 상급 레인에서 접영으로 세차게 물을 가르던, 자유형 40개를 거뜬하게 돌던 내 몸은 없다. 어, 없다.


삼십 고개를 함께 넘었던 친구들이 있다. 삽십 고개를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지리산 종주를 했는데, 나는 함께 가질 못했다. (당시 나의 썸남이었던 종필이 누나들 짐꾼으로 따라갔으니 그의 마음에 ♡담겨♡ 나도 함께 다녀온 걸로 되어 있다. 큭큭) 오십 고개를 넘는데 지리산은 못 가더라도 뭐라도 넘어야 한다는 취지로 한 밤을 함께 넘었다. 별스럽지도 않게 사는 얘기 살아온 얘기 끝도 없이 나누는데, 내게도 친구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은 딱 한 마디. 여기까지 잘 왔다! 이다. 20대에 마음이 끝도 없이 요동치던 시절에는 30대가 되면 사는 재미가 있을까, 싶었다. 결혼과 진로가 결정되면 고민이 없을 텐데 고민 없는 삶은 재미라는 게 있을까? 철없는 걱정을 했었다. 허허. 우리의 3,40대를 설명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정황 설명과 억울함에 대한 해명, 견뎌온 자신을 피력할 말이 필요한가. 그저 20년 전 지리산에서 홍천의 리조트로 휙 화살표 하나 그어 '여기까지 잘 왔다'로 해두자.


거실의 선인장이 뜬금없이 봉우리를 맺더니 꽃망울을 터뜨린다. 성탄 장식 옆에 두었더니 저도 대림을 기리겠다는 뜻인지, 주인 엄마의 반백을 축하 하겠다는 뜻인지. 빨간색 꽃망울이 예쁘다. 꽃망울이 예쁘지 막상 꽃을 피우면 신비감도 사라지고 그저 곧 시들어 떨어질 듯한 반백의 오십견 아줌마 같이 보인다. 그래도 이 겨울에 여전히 살아 생명의 숨으로 거실을 채워주니 고맙고 고맙다. 실은 가족들도 몰라주는 오십견 통증으로 외로울 때, 가장 큰 위로를 준 녀석이다. 그리 아까지도 않는 화초였는데. 그래서 더 고맙다. 


이제 하루 남은 거다. 나의 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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