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현승일 데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 집에 가던 때가 있었다. 집에 오려는데, 형아를 따르는 조카 셋이 병아리들처럼 졸졸 따라온다. 그날따라 엄마도 주차장까지 따라오신다. 조카 녀석 하나가 "할머니 왜 자꾸 따라와요?" 하니 "너는 왜 따러가? 인자 들어가. 나는 우리 이쁜 딸 더 많이 볼라구 그러지." 하시더니 조카들 눈치 살피며 "현성이(평생 현승일 그렇게 부르셨다) 할머니하고 손 한 번 잡자." 하셨다. 현성이 손에 은밀하게 만원 짜리 한 장이 건네 졌다.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돈을 주셨다. 엄마 용돈이 뻔한데, 매주 보는데도 볼 때마다 주시니 엄마에겐 돈이 적은 게 아니다. 어떤 땐 같이 가지도 않은 큰 애까지 챙기며 "이건 누나 갖다 줘." 하신다. 계산도 없이 왜 자꾸 애들에게 돈을 주냐 핀잔을 주곤 했다. "내가 어렸을 적이 어느 오이(외)삼춘이 만날 때 마닥(다) 돈을 줬는디 그게 안 잊어져버려 져. 애들은 돈 주는 사람을 안 잊어버려. 우리 현성이도 할머니 잊어버리지 말라고 주는 거지" 하셨다.

 

주차장 앞에서 엄마랑 조카들이랑 함께 셀카를 찍고, 연분홍 스웨터를 입고 오래 서 있던 엄마 모습이 아련하다. "우리 현성이 할머니 잊어버리지 말라고 주는 거지" 그 말에 어김없이 눈물이 났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단 한 번도 잊지 않고, 만날 때마다 아이들에게 조용히 만 원, 이만 원을 쥐어 주셨다. 함께 사는 손주들 부러워 할까, 돈 만원 꼭 쥔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다 조용히 건네셨다. 엄마 시력이 많이 흐려져 "니가 누구냐? 이게 누구여?" 하던 때는 조카 녀석들이 장난을 치곤 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 현성이에요." 하면 주무시다 일어나신 엄마가 "얼라, 현성이가 왔어? 온다는 소리도 없이 왔어? 혼자 버스 타고 왔남?" 하며 성경책에 끼워둔 돈을 찾아 내주셨다고. 녀석들의 '야곱 놀이' 꼬리가 길어서 밟혔는지, 하루는 외갓집 다녀온 현승이가 그랬다. "엄마, 할머니 방에 가서 인사를 드렸는데...... 니가 진짜 현성이여? 현성이 맞어? 하셔. 애들한테 하도 많이 속아서 못 믿으시겠나 봐. 돈을 주시다 말고 한쪽을 꼭 잡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셔." 하며 낄낄거렸다. 사랑스러운 할머니였다.

 

돈에 관해 꽉 쥔 손을 펴고 언제든 주고 또 주던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내게는 치유였다. 나는 엄마를 얼마나 지독하게 오해하고 있었던가. 엄마는 돈에 매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돈에 벌벌 떠는 엄마가 견딜 수 없이 싫었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엄마의 돈주머니가 지긋지긋 했다. 사춘기 시절,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래? 권사님이 돈 밖에 몰라!" 하며 대들었다. 대들고 쏘아붙인 말보다 더 맹렬한 비난을 속으로 퍼부었다. 동생과 나의 학업에 관한 지출, 즉 교육비 외 생활비는 최소한이었다. 아끼고 또 아꼈다. 나는 또  얼마나 사고 싶은 옷도 갖고 싶은 것도 많은 애였던가. 그리하여 아버지 사후 내 고통의 원인은 죄다 엄마였다. 엄마와 돈, 엄마의 신앙. 엄마의 걱정. 엄마의 잔소리. 엄마의 넋두리...... 돈에 대한 집착과 예수님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공존해도 되는 것인가. 그저 인색한 엄마가 싫다고 하면 될 것을, 반항기 충만했던 나는 돈과 신앙을 결부시켜 더욱 치명적으로 엄마를 공격했다.

 

분노만은 아니었다. 엄마의 돈, 돈, 돈은 철저하게 나와 동생을 위한 이타적 집착인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두 남매를 잘 키워야 할 책임감과 나이도 많고 의지할 것 없는데 과연 제대로 키우고 교육시킬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임을 알았다. 그 막막함에 맞섰는 방법이 엄마에겐 돈과 신앙에 집착하는 것이었다. 최대한 돈을 움켜쥐고, 한편으론 기도에 목숨 걸기! 그런 엄마를 알기에 분노만큼이나 연민했다. 연민하다 못해 동일시 되어 엄마의 한을 풀어 주고자 공부했던 것 같다. 엄마가 원하는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 들어가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단 다짐을 무의식적으로 하곤 했다. 원하는 대학과 학과가 있었지만 엄마가 바라는 대로 원서를 썼다. 엄마 꿈이 내 꿈이었다. 보기 좋게 떨어졌을 때는 내가 아니라 엄마가 가엾어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나와 동생은 어떻게든 컸고, 대학도 대학원도 나왔다. 결혼도 했다. 엄마는 드디어 책임감과 두려움의 짐을 내려놓을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대신 걱정의 옷을 입고 엄마의 '돈, 돈, 돈'은 계속 되었다. 뭘 하나 사들고 가면 "그거 얼마니? 돈 없는데 그 비싼 걸 왜 샀다니?" 외식 한 번 하려해도 "얼마라니?" (비싸면 안 먹으려고) 하신다. 용돈을 드리면 조용히 뒤로 돌려주기 일쑤이고. 나보다 내 살림살이 걱정을 더 많이 하는 엄마는 여전히 돈에서 해방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어린 날의 분노와 연민은 죄책감과 깊은 슬픔으로 바뀌어 자꾸 엄마 주변을 맴돌게 되었다. 2년 간격으로 양쪽 고관절 골절상을 입고 치료하는 과정으로 돌아가시기까지 6년은 힘이 많이 빠져 걱정 에너지도 함께 줄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남편이 새로운 교회에 청빙받아 옮기게 되었다. "담임 목사여? 얼라 그 동네가 부자 동넨디......" 담임 목사. 담임 목사란 무엇인가? 우리 엄마에게 담임 목사란 평생의 두 집착 돈과 신앙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축복이다. 늦둥이 아들을 일찍 '주의 종'으로 바치고 '진실헌 목사 되어 크게 쓰이게 해 달라' 평생 기도하셨다. 대놓고 명시하진 않았지만 그 기도 응답이 정점은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엄마의 아들은 진실헌 목사가 되기 위해 교회 개혁에 투신하여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다 목사직을 버리는 것으로 끝을 보았다. "야야, 사모의 '사'는 죽을 사 자여." 사모는 되지 않는 게 좋다고 세뇌시키며 키운 딸이 착한 평신도 청년을 만나 결혼하는가 싶더니. 한참 늦게 사위가 목사가 되었다. 이래저래 걱정이 늘던 중 그 사위가 담임 목사로 간다 하니. 이제 엄마로서는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평생 기도제목을 아들 대신 사위를 통해 응답해주셨다.라고, 엄마는 기뻐하신 것. 먼저 천국 가신 아버지 볼 낯도 생겼고. 평생 안쓰럽고 걱정스러운 딸이 '담임 목사'의 아내가 되어 '계급 상승' 하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바로 이모 삼촌에게 전화하여 "동생, 기도 많이 혀주야 쓰겄어. 우리 김서방이 담임이루 가게 됐어." 평생 라이벌인, 벌써 오래전에 담임 목사 엄마가 된 또 다른 외숙모에겐 힘이 많이 들어간 목소리로 통화하셨을 것이다. "우리 김서방이 담임이루 가게 됐는디, 부자 동네여. 내가 옛날이 아파트 분양받을 때 거기다 넣었으면 돈 벌었다고 다들 그러든 디여."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담임 목사'가 아닌데. 엄마의 꿈과 다른 이 새로운 교회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엄마, 담임 목사가 아니야. 그렇게 안 불러." "담임이 아녀? 부목(사)인감?" "아니 담임은 담임인데...... 보통 교회와는 좀 달라." 한국교회의 아픔을 그대로 담지한 새로운 교회를 엄마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목사의 전적 부패, 필(必) 부패의 전제 위에 세워진 교회를, 그 시스템을 순진무구한 신앙의 소유자인 엄마는 알아듣지 못한다. 엄마가 주일성수 목숨 걸고 지키듯, 목사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교회인 것을. 이 아픈 시대의 교회 얘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하는가. 계몽 불가. 엄마는 그냥 엄마의 꿈을 살도록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담임 목사로 불리진 않지만 담임이 아닌 건 아니니까,라고 차라리 나를 설득했다. 

 

해마다 여름, 동생네가 여름휴가를 가면 엄마는 우리 집으로 휴가를 오셨다. 그 한 주간 엄마가 좋아하는 메뉴를 돌려가며 해드리는 것으로 일 년 효도를 몰아서 했다. "느이 집은 참 평안하고 조용하구나. 애들이 어쩌면 그렇게 착허냐. 내가 더워서 부채를 찾다가 잠이 들었더니 우리 현성이가 어디서 부채를 찾어다가 내 옆이다 가만히 놓고 갔드라. 느이 내외간은 뭐 그렇게 둘이 할 말이 많어. 내가 잘라고 누웠는디 둘이 식탁이 앉어서 어트케나 속닥속닥 얘기를 혔샀는지 내가 혼자 웃었네." 일하며 아이들 키우는 딸이 안쓰러워 늘 걱정인 엄마가 일주일 집에 왔다 가시면 이런 것으로 위안을 받으신다. 착한 사위, 착한 아이들, 화목한 모습. 마지막 딸네 집 휴가는 돌아가시기 3년 전이었다. '담임'이 되어 교회를 옮기고 이사한 집에 처음 오신 것이다. 좁은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새우를 굽고 있는 나를 얼마나 지켜보고 있었는지, 등 뒤의 엄마가 물었다. "이게 사택이여?" "아니야. 사택 없다니까."라고 답을 하면 또다시 그 어려운 설명을 해야 한다.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 엄마가 먼저 대화를 끊었다. "그려도 너무들 헌다." 그리고 남은 며칠 엄마는 부쩍 말이 없어졌다. 채윤이가 "엄마, 할머니가 작년과 너무 말라. 말씀이 너무 없으셔." 연세가 더 드셔서 그렇다고 했지만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돌아가셔서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오시지 않았다. 너무 멀다, 계단이 힘들다며 고집을 부려 내가 동생네로 가서 엄마를 돌보게 되었다. 한 번 가야지, 그럼 한 번 가야지. 하셨는데 결국 사위가 담임 목사인 교회에 한 번도 오시지 않았다. 물론 그 후로 엄마의 담임 목사 타령도 끝났다.

 

엄마에겐 다 계획이 있었는데. 기도제목 또는 그냥 욕망이라 해도 좋다. 이 땅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살았으면 하는 삶에 대한 계획이 있었다. 엄마의 상상력으론 담임 목사만 되면 이루어질 꿈이었다.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마지막 휴가 주간, 꾹 다문 엄마의 입술과 굳은 표정은 너무나 아프게 가슴에 남아 있다. 그 집에 살았던 2년, 가족 모두 최악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럴만한 안팎의 환경들이 있었다. 가족들은 잘 모른다. 내가 그 집을 정말 싫어하는 이유는 그 여름 엄마의 마지막 휴가, 엄마의 꾹 다문 입술이 슬퍼서라는 것을. 엄마의 계획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돈에 관한 최후의 계획이 있었다. 너무 오래 살아서 막내아들 며느리 고생시킨다고 미안하단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야야, 내가 죽고 장례식 치루면 조의금이 나올 것 아니냐. 그게 얼마가 됐든 한 푼도 욕심내지 말고 다 운형이 줘야 한다. 이 집이 차를 바꿔야 혀. 니가 오빠들한테도 말 잘혀서 그걸로 운형이 차 바꾸게 혀줘라." 돈 걱정 주식회사 엄마의 마지막 계획이었다. 코로나 19 시작과 함께 떠나셔서 가족장으로 치렀고 그 마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의 기도를 끝내 들어주지 않으셨다.

 

돈에 관한 최후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한 인생의 끝, 돈 걱정으로 일관된 엄마 인생의 결국을 확인하면서 나는 본다. 엄마의 계획보다 더 큰 계획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의 돈 걱정이 아니라 엄마의 걱정 뒤에 숨어 있던 내 욕망을 본다. 공부 열심히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엄마를 호강시켜야겠다는 다짐은 정말 엄마를 위한 것이었을까. 엄마의 욕망을 욕망하다 그것이 나의 욕망이 된 것인지, 애초 내 안에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엄마 걱정이 아니라 내 걱정이었고, 내 욕망이었다. 엄마를 위한 슬픔이 아니라 자기 연민이었다. 어쩌면 엄마는 이미 자유로워졌는데, 엄마를 빙자하여 내가 붙들려 있었던 것이다. 늘 하던 습관대로 입으론 돈 걱정이었지만, 엄마의 주머니는 열려 있었다. 손주들에게, 심지어 나에게도. 농담 삼아 "엄마, 왜 나는 용돈 안 줘?" 하면 "얼라, 돈 버는 사람이 저런댜." 하면서 손을 이미 (돈이 끼워진) 성경책갈피를 더듬고 있었다. 

 

나름대로 엄마에겐 야심 찬 계획이었는데, 사상초유의 코로나 사태라는 복병이 나타날 줄이야! 한 발 물러 돌이켜보면 헛웃음도 나온다. 엄마, 어떡해? 실패야!라고 말하고 나니 엄마가 내게 말하는 것 같다. "괜찮여. 나는 이제 돈 걱정 없는 곳에 와 있으니 아무 상관없어. 너도 이제 내 걱정 말고 감사하면서 살어. 기도 많이 혀라." 엄마에게는 아니 주님께는 더 큰 계획이 있었구나! 엄마가 없으니 엄마 핑계로 내 욕망을 위장할 수도 없다. 마지막 휴가, 그 싫었던 집 소파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엄마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밀려오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다. 나는 이제 안다. 이 슬픔은 엄마가 아닌 나의 것이라는 걸. 중세의 여성 신비가인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Catherine of Siena)가 말하는 자기연민, 영적 이기심에서 비롯한 눈물이라는 것을. 엄마가 돈 걱정 없는 나라로 가서 다행이다. 나는 엄마보다 더 배웠고, 더 사랑받았으니 더 나은 삶을 살아야겠다. 죽음을 통과하여 들어갈 그 나라에 가기 전, 바로 지금 여기서 시작해야겠다. 기도제목이란 미명 하에 실패로 끝날 계획들에 나를 허비하는 일을 멈추고, 내게 없는 것을 가진 이를 시기 질투하며 자기연민에 빠져 살지 않겠다. 또 다른 여성 신비가인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Ávila)의 기도에 곡을 붙인 노래가 올초부터 내내 가슴에서 울리고 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나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엄마의 돈 이야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중세 영성가들 공부를 하는 중, 여성 신비가들의 삶과 신앙을 보면서 엄마가 떠올랐다. 그분들의 남다른 신심,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갈망을 어쩐지 어디서 본 듯하였다. 엄마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예수님을 신랑 삼아 기도로 일생을 살지 않았을까. 언젠가 둘째 현승이가 어느 어른을 빗대어 외할머니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외할머니는 분명히 돈이 없는데 꼭 부자처럼 느껴져." 이제 와 아이에게 말할 수 있겠다. "맞아, 현승아. 할머니는 부자였어. 할머니는 하나님을 소유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야. 이제 와 생각하니 할머니 정말 부자였어." 이젠 내 몫이다. 엄마 떠난 자리에서 결국 지나가고 말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슬픔과 혼란에 영혼을 내주지 않고 엄마의 뒤를 따라가리라. 용돈 잘 주는 할머니로 늙어가리라. 

 

생신 같은 날 노래를 시키면 부르던 엄마의 18번 노래가 있다. 도대체 몇 절까지 있는지 끝까지 확인을 못했고, 우리끼린 '네버 앤딩 송'이라 부른다. 이 노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기도 못지않은 아름다운 고백 아닌가.

 

예수 소유하야서 나는 부자 되고

예수 한 분 잃어서 나는 그지 되네

예수여 예수여 내 중심이 오셔서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네다 

 

엄마가 남긴 유산, 돈이 아주 값지고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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