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과 함께하는 내적여정 24




나는 괜찮지 않아

함께 했던 긴 여정을 끝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속사람에게로 떠나는 여정에 함께 하자며 드렸던 초대장을 기억하시나요? 그 초대장에서 저는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내어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그것은 ‘나는 폭탄이다.’였지요. 관계의 폭탄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관계’ 문제에 관한 한 실패투성이인데, 이것은 저의 치명적인 콤플렉스였습니다. 그걸 제 입으로 말한다는 건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요. 성격도 웬만해 보이는데다 마음을 치료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제게 그런 치부가 있다는 것은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행여 이것이 알려질까 두려웠고 저와 틀어진 관계의 어떤 사람이 제 뒤에서 손가락질할까 노심초사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관계의 실패자’라고 이름을 붙이고 인정했을 때 새로운 문이 열렸습니다. 그 지점에서 서글서글한 성격과 신앙심으로 꽤 괜찮은 사람이라 여겼던 저 자신이 ‘뭔가 도움이 필요한 괜찮지 않은 존재’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저는 운이 좋게 에니어그램을 만났습니다. 제게 필요한 도움은 ‘빛’보다 ‘어두움’을 보게 하는 개안(開眼)수술이었습니다. 수용적이고 너그럽고 관계의 문제라곤 없는(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부러워도 하고 질투도 했지요. ‘관계’에 관한 강의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어떻게든 배워보려고도 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삶의 양식들을 더 폭넓게 이해하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구요. 그런데 제게 가장 필요했던 건 제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두려움 없이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니어그램은 수술 전 내시경의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습니다.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나의 집착과 회피를 받아들이면서 신기하게도 필연코 내가 틀어지는 관계로 몰아가게 되는 사람들의 유형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대고 어떻게든 주목받으려고 안간힘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호감형은 아니지요. 그런데 저는 이런 사람들을 안 좋아해도 너무 안 좋아하는 것입니다. 봐주질 못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제 안에 튀고 주목받고 나대로 싶은 욕구가 충만합니다. 어릴 적에 ‘목사 딸’이라는 이유로, 그 밖의 이유로 허용되지 않았기에 없는 걸로 치고 내면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것입니다. 나는 하고 싶어도 못하는 짓을 대놓고 하는 사람들에게 너그러울 수 없었던 것이지요. 너그럽지 않은 마음은 어떻게든 몸으로 나오고 그러다 보면 관계가 껄끄러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한 번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저는 멈추는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


에니어그램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열어야 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제 마음의 지하실엔 심하게 왕따를 당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왕따의 기억 자체만으로도 아픈 일이지만 그 때 했던 엄마의 한 마디 ‘니가 교만해서 그런거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가 주홍 글씨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왕따인 내게 엄마조차 ‘니 탓’이라고 하니 듣기는 싫었지만 ‘진실’이라 여겨 마음에 새겼던 것입니다. 해서 관계에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무조건 ‘내가 교만해서 그래. 내가 나빠서 그래. 내 탓이야.’하는 소리가 마음의 지하실에서 쩌렁쩌렁 울립니다. 끝없이 돌아가는 오토리버스 카세트 테잎 같습니다. 어차피 나는 그런 애니까 하는 자괴감이 깔려있습니다. 결국 작은 문제든 큰 문제든 일단 관계의 문제가 생기면 과도한 에너지를 쓸 뿐 도통 문제를 해결하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지하실에 들락거리다 보니 관계 문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에서 있는 그대로의 저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교만한 저 자신을 누구보다 제가 비난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엄마의 착한 딸이 되려면 모든 사람과 완벽하게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되도 않는 제 마음의 율법이 문제였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자 지하실에 빛 한 줄기 비쳐들고 산들바람이 살살 지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땅을 살면서 누구도 저에게 완벽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없는데 ‘니가 교만해서 그래’ 한 마디에 매여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붙들고 살아온 것입니다. ‘나는 괜찮지 않아.’ 하면서 에니어그램의 현관문을 연 이후로 정상과 바닥을 오가며 분열적으로 보내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아, 정말 괜찮지 않네. 이 정도로 안 괜찮았던 거야?’ 하면서 제 마음 속 지하실의 구정물과 어두움에 토할 것 같은 나날이 오래가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 요즘은 처음과는 조금 다른 뉘앙스로, 말하자면 불필요한 자책은 많이 덜어낸 느낌으로 말합니다. ‘나는 괜찮지 않아.’


당신도 괜찮지 않아

나의 괜찮지 않음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니 비로소 그렇게 크게만 보이던 다른 사람들의 결점이 정상적 크기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음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안 괜찮음’을 발견하고 드러내면서 나의 우월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관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집게손가락을 들어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원인이 있음을 드러내려 합니다. ‘상대방을 안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수록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될 것이다.’ 라는 누가 가르치지도 않은 뒤틀린 율법 2장입니다.

내가 크고 작은 고통에 맞닥뜨리기가 두려워 ‘쾌락’이라는 반쪽짜리 기쁨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모두들 그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더 잘 보게 되었습니다. 누구는 완벽함에 매여 있고, 누구는 남을 돕는 것으로 사랑받으려는 것에 매여 있습니다. 또 누구는 충분히 아는 것이 자신을 구원할 거라 믿으며, 남과 달라야만 사랑받을 것이라며 끊어질 듯 말 듯한 썩은 동아줄을 붙들고 위태위태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의 지하실에서 웅웅거리는 두려움의 목소리가 남편에게도, 친구에게도, 무엇보다 오래도록 나를 힘들게 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도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있는 나쁜 동기가 바로 그 사람에게 있다고 덮어씌우던 것처럼, 내 마음의 두려움이 보이니 그 사람 속의 불안이 알아채지는 것입니다.

그래요 ‘당신도 그리 괜찮지는 않아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을 ‘자기긍정, 타인긍정(I'm OK, You are OK)의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기긍정과 타인긍정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부정과 타인부정의 과정이 필수과정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충분히 슬퍼함 없이 회개했다고 나서는 것을 ‘진정한 회개’로 안쳐주는 것과 같습니다. 빛으로 가는 길은 그림자에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괜찮지 않다.’라며 뼈아픈 실패를 받아들이던 그 순간이 바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나의 괜찮지 않음으로 아팠던 그 순간이 바로 초대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속사람에서 온 초대장을 소파에 기대 앉아 편안하게 받아들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그 초대장의 제목은 ‘너는 괜찮지 않아.’이니까요.

나도 당신도 그리 괜찮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고 나니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굳이 I'm OK까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으니까요. 아, 내가 괜찮지 않은 것이 은총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고,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고, 홀로 설 수 있는 의인이 아니라 십자가 없이 출옥 없는 죄인이라는 뜻이니까요.



꽤 괜찮은 ‘에니어그램’이라도

영적인 삶을 살고자 갈망하는 우리에게 에니어그램은 꽤 도움이 되는 도구입니다. 매일 매 순간 하나님 붙드는 대신 성격의 틀 안에서 나를 견고히 하려는 우리를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적 성격유형 지표들과 다른 접근을 하기 때문에 ‘영성적 에니어그램’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어떻게든 보고 싶지 않은 우리의 어두운 내면을 에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보기 드문 거울입니다. 마음의 동기를 달아보시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 기도로 나아가고 싶을 때도 참 좋은 안내자가 되어 줍니다. 시간이 걸리고 아프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참 좋은 너’를 받아들이게 하는 안경이기도 합니다.

꽤 괜찮은 이 에니어그램을 저는 언젠가는 버리고 싶습니다. 아니, 영적인 여정을 가는 어느 순간에 자연스럽게 버리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니어그램 아홉 가지 유형이 다 내 안에 있기 때문이고, 아홉 가지 근원적이 죄가 다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니어그램’으로 분석하지 않아도 죄 된 내 모습을 기도 속에서 그 때 그 때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때 마다 사랑이신 그 분 앞에 엎드릴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에니어그램은 종국에 저를 기도의 자리로 끌고 갔습니다. 괜찮지 않은 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갈 수 있는 그 순간에 더 이상 에니어그램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디 독자 여러분께도 에니어그램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사랑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했던 에니어그램

커피 한 잔을 마주하고 시작했던 긴 여정을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좋은 분들에게 정말 좋은 걸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에니어그램을 커피와 묶었었습니다. 기도를 하듯 조용히 천천히 내린 핸드드립 커피의 향에 에니어그램의 깊은 영성을 담고 싶었습니다. ‘가르치는 자’로 말하고 싶지 않아서 아홉 명의 친구들을 불러 대화하며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아홉 명의 친구들이 말을 할 때는 감탄사 하나도 신경을 써서 가장 ‘그 유형스럽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여정을 더 솔직하게 나누려고 애썼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웠지만 결국 제 자신에게 가장 유익했습니다. 누군가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시는 커피의 맛이 있습니다. 매 달 글을 쓸 때마다 마시던 커피였습니다. 이제 혼자 커피를 마셔야 할 시간입니다. 혼자 마시는 커피는 고요함으로 나를 안내합니다. 커피 내리는 소리, 은은히 퍼지는 커피향으로 분요한 내면을 가라앉힙니다. 그리고 특유의 각성효과로 깨어나게 합니다. 커피로 인해 각성될 때마다 지금, 여기의 사랑에 깨어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디 쯤 와 있든 우리의 영적인 여정은 ‘아직도 가야 할 길’입니다. 그 여정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나 향 좋은 커피 한 잔 나눌 날도 기대해 봅니다. 초대받아 여기까지 함께해주신 당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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