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4학년 때 교생실습을 나갔었다. 유아교육과니까 당연히 유치원으로 나갔다. 교생실습 막바지에 가면 교생 혼자서 일일교육 프로그램을 짜고 운영을 하는 일이 있다. 물론 이 때 채점이 되고 교생실습의 학점을 좌지우지 하게된다.

암튼, 내가 그 all day 수업을 하는 날에 담당 교수님께서 지도 방문을 오셨다. 그 시간은 실내 활동을 모두 마치고 바깥놀이 활동을 하는 시간이었다. 엄마를 만나듯 반가운 맘으로 교수님을 뵙고는 '이제 수업 다 끝났어요. 바깥놀이만 하면 하교예요' 했더니...'수업이 끝나다니? 바깥놀이는 수업이 아닌가?' 하셨었다.


그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줄 때만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내 원시적인 교육관이 깨달아진 날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때의 경험인지....요즘 음악치료를 하면서도 나는 음악이 없는 순간, 그 순간의 소중한 치료적 의미를 깨달아간다. 열심히 북을 두드리고 나서 오는 조용한 침묵의 시간을 채우는 아이들의 행동 하나. 연주하는 시간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다.


아이들에게 여백을 주기.


채윤이 유치원 친구들은 이미 거의 초등학교 수준의 과외들을 하는 것 같다. 한글, 영어, 발레, 수학, 미술, 피아노, 영어 뮤지컬 놀이......뺀뺀이 놀면서 글자 한 자 제대로 못 쓰는 애는 채윤이 밖에 없는 것 같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나도 좀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친구네 집에가서 미술 전공한 친구 엄마랑 미술놀이 하는 것, 것두 미술은 한 30분 하고 네 시간 이상을 친구랑 놀다 오는 것이 채윤이 과외의 전부다. 최근 조금은 불안했었다. 소신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이 못시키는 것 아닐까?하는 마음이 스스로 들 정도였다.


최근에 읽고 있는 <잃어버린 교육, 용기>라는 책을 읽으면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아이들에게 여백을 줘야한다. 쉽게 말해서 아이들 스스로 시간을 채우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열심히 놀 수 있는 여백의 시간들이 있어야 한다. 유치원 교사를 할 때부터 내게 변하지 않는 소신 하나는 '잘 노는 아이가 잘 큰다' 이것이다. 잘 놀려면 잘 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제공되어야 한다.


요즘 들어 채윤이랑 현승이가 둘이서 미친듯이 놀아대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이들이 놀이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최대한 아이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방해하지 않으려 애쓴다. 충분히 상상하고, 충분히 환경을 조정하고, 충분히 에너지를 쏟아내라고. 그 시간을 확보해 주는 것이 여섯 살, 세 살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 정신실이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가서 정만 신기하다는 듯이 아이들이 널어 놓은 난장판을 보면서 '와~아, 이게 뭐야?' 하고 경이를 표해주는 정도. 그 정도면 족하다는 생각이다. 채윤이가 어리고 혼자였을 때는 사실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놀아줬었지만 지금은 두 녀석 노는 것에 마당만 잘 깔아주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 시간을 통해서 현승이는 말을 배우고, 의사소통의 방식들을 배우고, 삶을 배운다. 채윤이도 마찬가지겠지.


두 녀석이 싸우는 일이 갈수록 많아진다. 한 놈이 다른 놈을 때리지 않은 이상, 나는 싸움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싸움에 여백을 주기 위해서다. 그 여백을 통해서 싸움을 싸우고 해결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다. 현승이 같은 경우 죽자 사자 울면서 엄마의 도움을 구해도 '니가 누나한테 한 번 말해봐. 가서 친절하게 말해봐'하는 정도로 멘트를 해주고는 일부러 딴청을 해본다. 물론 빨리 참견을 해서 상황을 정리하고픈 충동이 없는 것 아니다. 그런 때는 나와의 싸움이다. 최대한 개입하고 간섭하지 않기. 참자.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하면서 최대한의 싸울 시간을 준다.


아이들이 넘어졌거나,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할아버지와 싸워서(?) 울 때도 내가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으면서 여백을 확보해 보려한다. 역시 매 번 잘 되는 일은 아니다.


나는 특히나 S와 F 성향이 강해서 개입하고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어서 아이들 문제가 아니더라도 훈련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훈련이 거듭될수록 아이들이 커지는 만큼 나도 함께 자라갈 것이라는 기대와 기쁨이 있다.

200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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