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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묻고 또 물어 자신 안에서 충만해지고, 그리하여 의미의 강이 흘러 넘칠 때 비로소 시동을 걸어 악세레이터를 밟는 남자. 일이든 사람이든, 그 무엇에든 의미가 되고 싶어 시간을 많이 들이는 남자. 일 중독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남자였다. 그 남자가 의미를 곱씹을 새 없이 새벽부터 밤 10시, 11시까지 매일 달릴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여보, 나 일중독인가봐' 하며 쉼 없이 4년 째 달리고 있다. 그 남자에게 꿀 같은 겨울 피정이 주어졌고, 예수원을 향해 홀로 태백행 고속버스를 탔고 떠났다. 휴대폰 등 세상과 닿는 모든 기기를 잠시 꺼두시고 맡겨두셔야 하는 곳인지라 '안녕'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연락 두절이다. 그 이후 갈비뼈 1번과 2번 사이 어딘가에 묵직한 것이 하나 들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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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무엇이든 '함께' 하는 것인 줄 알았다. 혼자 있고 싶어하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욕구를 내비치는 건 분명 나를 싫어한다는 뜻이려니 싶어 견딜 수 없던 적이 있었다. 결혼 후 1년쯤 되었을 때 사람이 자기 생긴 꼴대로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을 배우는 중이었다. 모처럼 휴가를 낸 남편에게 '혼자 시간 보내고 와'라고 말했다. 그날을 기억한다. 일하고 신혼집에 돌아왔는데 나보다 늦게 나간 남편이 편지를 써 놓았다. 주저리주저리 어쩌구저쩌꾸 하다가 편지 끝에 '형광등을 끄고 스탠드를 켜시오, 오디오를 켜시오.' 이런 주문이 적혀 있었다. 오디오를 켰는데 뙇! 어떤 음악이 나왔고, 엄청 감동이었는데 그 음악이 뭐였더라 생각이 안 난다. 아무튼,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간임을 이해받았다는 것이 참 좋았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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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뭐든 '함께, 함께, 같이, 같이' 하던 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존재였다. 아이들 어릴 때, 육아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차서 분노의 증기가 콧구멍으로 귓구멍으로 눈빛 레이저로 쏟아져 나올라치며 남편이 그랬다. '여보, 내가 애들 볼게. 방에 혼자 들어가서 기도를 하든, 말씀을 보든, 뭐든 해.' 자주는 아니고 몇 번 있었던 일인데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고맙다.  믿기 어렵겠지만, 아직도 서로 좋아하고 약간 설레고 그런 사이이다. 내 패이스대로 무엇이든 같이!를 고집하며 살지 않기를 잘한 것 같다. '진실과 헌신'이 관계 맺음의 모토였는데, 이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따로 또 같이-적절한 거리 두기'의 적절함의 질과 양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각자의 영역을 지켜주고, 홀로 있을 시간을 확보해주는 것, 그러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나 같은 사람에겐 더욱 어려운 일이었지만, 입에 써서 몸에는 참 좋은 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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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갈수록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 뭐더라? 사랑이. 그를 사랑하나? 내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나? 잘 모르겠다. 느끼는 것도, 그 느낌을 표현하는 것도 어렵다. 느낌으로 강렬할 때는 차라리 '연민'이다. 가엾게 느껴질 때, 너무너무 가엾게 느껴질 때,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을 때 감정이 최고치를 찍는 것 같다. 그럴 땐 일찍 잠든 남편의 가슴에 손을 대고 소리 없는 기도를 한다. 그럴 때는 가슴 부분에 실제 통증이 느껴진다. (아이들에게도 종종 하는 일이고, 종종 느끼는 감정이다) 아, 남편의 사랑을 느끼는 것도 비슷한가 보다. 말치레라고는 모르는 기름기 없는 남편이(말치레라고 해봐야 너~어무 말치레스러워 화를 돋울 뿐이다.) 보기보다 헐랭이이며 허당인 내게 '으이그, 불쌍한 정신실' 할 때, 괜히 마음이 따스해진다. 이럴 때 사랑이라고 느끼나 보다. 우리 사랑, 너무 올드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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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블로그 이름이 'The wounded healer'에서 '아픈 바람'으로 바뀐 지 몇 달이 됐다. 나는 가끔 남편이 우리 시대 목회자로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교인들은 뚜렷한 것을 원하고, 강력한 정답을 원한다. 설교 한 방, 설교의 결론으로 낸 적용 한 방이면 생의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장담을 해줘야 능력 있는 지도자로 여기는 것 같다. 심지어 청년들은 밟아주고 무시해주는 사역자를 유능한 목회자로 본단다. 나 역시 간간이 청년들을 만나며 피부로 느끼는 점이다. 되든 안되는 확신 있게 말해주고, 으스대는 태도를 보이면 오히려 미더워해주는 것 같다. 작년 겨울 피정 때 남편에게 농담으로 '시대와 불화하는 목회자가 되라'고 했었다. 사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이 시대와 뭔가 늘 서먹하고 어색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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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고독한 발걸음이 하루 종일 아픈 바람으로 내 마음을 뒤흔든다. 위에 걸어놓은 나무 사진을 찾으려고 남편 아이패드의 사진첩을 뒤지며 한참 사진 구경을 했다. 그 사람다운 것이 뭔지도 이젠 잘 모르겠지만, 그답지 않은 사진들과 가끔 그다운 사진들을 보며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하던 기도의 마음이 되었다. 자꾸 가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오늘 좀 사랑이 샘솟는 모양이다. 올드한 사랑 말이다.  

 

그리고 아픈 바람, 그의 목소리.

 

http://nouwenjp.tistory.com/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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