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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고독_앙:단팥 인생 이야기 본문

인간의 얼굴을 가진 리뷰

외로움과 고독_앙:단팥 인생 이야기

larinari 2015. 9. 28. 21:00

 

 

 

영화 <앙:단팥 인생 이야기> 관람 후기입니다. 

영화 참 좋구요. 아직 상영 중이에요.
좋은 영화라니 믿고 봐야겠다, 하시는 분은 이 글은 읽지 마세요.
일단 청순한 뇌를 가지고 영화관에 가셔서 영화를 먼저 즐기세요.

 

 

이런 성격에, 좋은 벗을 많이 가진 내가 너무 자주 외로워하는 건 아닐까. 자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중한다고 자중이 되는 게 아니어서, 좋은 사람이 있다고 없어지는 외로움도 아닌 듯하여 '이거 어쩌나' 이름 붙이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랬던 어느 토요일 오전, 나의 일주일을 일주일 되게 하는 스케쥴 하나. 한겨레 토요판을 열어 <정희진의 어떤 메모>를 찾았다.  제목이 '외로움'. '내가 진짜 외롭구나. 이제 헛 게 다 보이네.' 헛 글자가 보인 게 아니라 정말 제목이 그러했다.

 

금요일 저녁. 비까지 내리니 라디오는 감상(感傷)으로 넘친다. 외로운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내가 외로움에 대해 무슨 견해가 있을까마는, 분명한 것은 나 같은 타입은 외로움을 견뎌야지,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가는 우리 엄마 말대로 “인생 망조의 지름길”이다. 외로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책이 있는데 그들은 너무 쌈박하다. 분석하고 이해하면 뭐하나. 그들이 가버린 후(읽고 난 후)에도 외롭긴 마찬가지인데.

 

라면서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읽은 감회를 털어 놓는다. ('정희진의 어떤 메모'라는 꼭지로 말하자면 '리뷰'이지만 단지 책의 이야기로 읽히는 적이 없다. 그야말로 그 누구도 아닌 정희진으로서 다시(re) 읽어내기(view) 때문일 것이다. 부럽다 말하느니 존경한다 하겠다.)  이 글을 읽고 나 역시 외로움에 대해 무슨 견해를 가질 깜냥도 아니지만 그냥 조금 외로워하기로 했다.

 

모처럼 맘껏 늘어져도 되는 날이 생겨서 영화 일 편 하러 광화문에 나갔다. 내 기분이 가라앉으면 늘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남편 유죄, 쾅쾅쾅' 하는 형국이다. 전혀 그런 일이 아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나 이런 영화 보러가. 단지 희망을 얘기하는 영화라는 이유로 선택했어' 남편에게 보고를 했다. '내가 외로운 건 당신 탓이 아니야' 라는 뜻이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싶었고, 어떻게 생겨 먹었든 희망이란 걸 보든지 듣든지 하고 싶었다. <앙:단팥 인생 이야기>는 그걸 보여줄 것 같았다.

 

한센병으로 평생 담 안에 갇혀 지낸 할머니, 한 번의 실수로 감옥에 갇혔다 나와 작은 도리야키 가게를 지키는 또 다른 감옥에 갇힌 젊은 남자, 가난이라는 새장에 갇혀 축쳐진 날개로 오락가락 하는, 제가 키우는 카나리아 같은 여학생. 세 주인공 모두 고립되어 외롭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뭐야, 희망이 어딨어? 어딨긴 어딨어? 희망이 없는 곳에서 피어나는 게 희망이지.

 

가장 긴 세월 외로웠을테고, 누구보다 절망적으로 절망적이었을 도쿠에 할머니가 삶는 팥으로부터 영화의 희망은 피어난다. 보기에도 민망한 일그러진 손으로 삶아서 만들어내는 도리야키 안에 들어갈 팥이 새로운 희망을 가져오고, 역시나 희망 뒤에는 더 깊은 좌절이 찾아온다. "단팥을 만들 때 나는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것은 팥이 보아왔을 비오는 날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요" 도쿠에 할머니가 처음 팥을 삶으며 했던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나도, 도리야키를 만들던 젊은 남자도, 여학생도 할머니가 살면서 보아왔을 비오는 날과 맑은 날을 상상하며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다. 물론 상상하자니 먹먹해지고 눈물이 난다. 정희진 선생님의 위의 글 마지막 부분이다.

 

김영갑은 젊었을 적 죽고 싶어 했지만, 난치병 선고를 받자 생명과 평화에 대해서 썼다. 그것은 기다림이다.(207쪽) 그는 병이 악화되자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일도 없으리라”고 다짐한다. 빠른 길은 없다. 외로움은 견디는 것이다. 외로움은 시간을 참는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는 일이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그가 말한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 다리 한쪽이 잘린 노루가 뛰어다니고, 날개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꿩”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마음이 조금 간절한 상태다. 취약함은 외로움의 일부일 뿐이다. 그는 외로움‘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고독은 고스란히 화면으로 남았다. 작가의 일상이 이토록 작품 자체인 경우가 있을까. 사진이 그다.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놀라움은 그가 외로움을 극복해서가 아니라 그 외로움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외로움은 마음이 조금 간절한 상태이고, 취약한 상태임에 공감하지만 외로움이 '강하다'는 것은 잘 모르겠다. 진정한 강함은 외로움에서 나온다는 걸 머리로 공감할 수는 있다. 머리로 공감되지만 가슴으로는 모르겠는다는 것은 외로움의 시간을 묵묵히 참아본 경험이 없어서일까. 날개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는 꿩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기다리고 견뎌볼 줄을 몰라서.

도쿠에 할머니가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을 향해, 나뭇잎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아있다. 길을 가다 건너편 인도를 걷고 있는 반가운 친구를 발견한 표정으로 환히 손을 흔드는 모습. 평생 단절되어 살아온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지 짐작이 가는 장면들이다. 외로움은 그저 견디는 것임을, 다른 길이 없음을 도쿠에 할머니는 누구보다 빨리 깨달았을 터.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영적 발돋움>의 한 챕터가 생각난다. 폐쇄된 외로움(loneliness)에서 열린 고독(solitude)으로의 발돋움. 외로움에 던져져 피할 길 없다며 뒹굴고 자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외로움의 굴 안으로 발을 내디딜 때 상상하지 못했던 카타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느낌으로 읽었었다. 글을 쓰다 말고 책을 찾아 뒤적였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 밑줄 그어놓은 부분들을 읽었다.

 

자신의 안식 없는 외로움을 마음의 고독으로 바꾸면 바꿀수록 그는 자신의 내면의 중심에서 이 세상의 고통을 발견하고 거기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도쿠에 할머니가 벚꽃 흩날리는 거리를 걸어 이상한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도리야키 가게로 계획적인 접근을 한 것이다.

 

"평생 담장 밖엔 못 나갔다는 그런 눈빛이었지 .. "

 

평생 담장 밖에 못 나가본 할머니가 도리야키 만드는 젊은이를 우연히 본 처음 본 느낌이란다.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을 알아본 것이고, 갇혀본 사람이 고립된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헨리 나우웬 식으로 말하자면 할머니 외로움의 끝은 고독이 되었고, 그 고독의 중심으로부터 세상의 고통을 발견하고 반응하는 눈이 생긴 탓이리라. 정희진, 김영갑, 도쿠에 할머니, 헨리 나우웬 님. 총동원 하여 내 외로움에 관심을 가져주니 나 역시 외로움을 피하지 않고 견디고 공감할 밖에....

 

 

 

* 관람 부작용 또는 후유증 :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면 어느 새 고개를 쳐들고 손을 흔드는 나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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