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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2학기 때 쯤으로 기억된다. 매주 음악치료 실습이 있었고 그 날 그 날 점수가 나왔다. 돌이켜보면 거의 중독적으로 점수 계산을 하곤 했다. 뻔한 점수를 계산하고 또 계산하고 그랬다. 학교를 갔다와서 늦은 밤 책상에 앉으면 점수계산 먼저 했다. 상담심리 과목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 대한 강의를 들은 날이었다. 이전에 전에도 무수히 들었던 '프로이드의 무의식'이 귀에, 마음에 팍 꽂혔다. 그리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점수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 그 밑에는 엄청난 경쟁심이 있다는 것, 더 밑에 있는 '과연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의 존재를 순간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대학원 이후로 융심리학은 내 마음의 눈을 뜨는데 (심지어 어떨 땐) 복음 이상의 역할을 하였다. 내가 얼마나 '자기라는 성 안'에 갇혀서 살았는지, 그로 인해서 타인도 세상도 심지어 하나님도 내 식대로 받아들이면 나를 괴롭히고 타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긴 여정이었다. MBTI와의 만남을 통해 융의 분석심리학에 빠져 한 동안 전공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었다. (딴 얘긴데... 학부 때는 전공인 유아교육 대신 여성학, 대학원 이후엔 전공인 음악치료 대신 융심리학, 지금은 음악치료 대신 커피에 목숨을 거는 난 도대체 뭐냐? 뭐지?)


에니어그램을 하면서 상처받은 내면아이와 만나는 작업을 오래 해오고 있다.  왜 어쩌다 이 여정에 초대되었는 지는 사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저 '신앙과 삶이 따로 놀지 않는 나' 이길 바라며, 더 깊이 하나님에 대한 앎과 더 깊은 기도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여정을 가야하는 것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게 영적여정은 이러하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어린 시절 결핍에 사로잡힌 눈으로 나를 보고, 타인을 보고,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 말이다. 두툼한 일기장에 수많은 나만의 상처 이야기와 치유 이야기가 쌓이고 또 쌓이고 있다.(그 이야기들이 조금씩 일기장 밖으로 삐져 나오고 있는 중)


정신분석, 아니 그렇게 거창한 것은 잘 모르고 '의식성찰'이라는 미명하에 내 마음의 동기를 파헤치고 또 파헤치다보면 많은 부작용들을 만나게 된다. 내 안에 선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고, 그것들은 바로 투사가 되어 다른 사람을 향해 비춰진다. 세상 사람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여'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구속한 주는 간 곳 없고 죄투성이 인간'만 보이게 되는 감옥같은 순간이 온다. 거기가 끝이라면 에니어그램이며 내적여정 같은 것들은 그저 독, 맹독일 뿐이다. (말로하면 이렇게 짧은 한 단락을 몸으로 살고 머리로 정리하기 까지는 얼마나 긴 시간과 고통이 필요했었는지...)



지난 토요일 저녁, 김형경의 심리에세이 <만가지 행동>을 읽은 터였다. (남편이 전날인가, '이런 책 이제 그만 읽어 여보' 했고, 나는 '이번에 쓸 글에 참고할 게 있어서..'라고 했다) 간만에 보는 정신분석 이야기라 파바박!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투사, 시기, 전이, 역전이 등의 용어로 마음을 설명하는데 몰입이 되어 내 마음, 남의 마음을 보는 매의 눈이 간만에 날카로와진 상태였다. 퇴근해 들어온 몸과 마음이 곤고한 남편에게 살짝 불편한 마음이 생겼는데 순간적으로 정신분석적 용어로 마음이 정리되면서 불편한 마음이 증폭이 된 것이다. 아! 이 지점이다. 이 여정에서 헛갈리곤 했던 지점. 안 보이던 마음의 역동이 보여서 좋긴한데, 보여서 더 버거운 이 지점말이다.


이건 완전 괄호임. (물론 이젠 그런 역동을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약.간.의 자정능력이 생기기도 했다. 한참 이거 심할 때는 얼마나 심하게 목을 조였는지... 김종필님 고생이 많으셨었다. 마음이 넓고 점잖으시고 인격이 훌륭하시고, 온유하시고, 캐 동안이시고, 키도 크시고, 썰렁 유머도 잘 하시고, 가끔 설교도 잘 하시고, 결혼식 주례도 잘 하시고, 잠도 많으시고, 길도 잘 찾으시고, 커피 맛도 잘 아시는... 김종필님께 늘 심심한 감사를 반복하여 표현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완전 괄호 닫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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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으로 맞은 주일이고, 주일예배였다. 설교제목은 '기도할 곳이 있을까' 였다.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한 바울팀이 도착한 빌립보. 제2의 로마라고 불렸다던 그 거대한 도시에서 빈 주먹 쥐고 들어간 일행이 할 수 있었던 건 기도할 곳을 찾았다는 것이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미약하고 의존적일 수 밖에 없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 존재의 현주소를 깨달았을 때 창조주 그 분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기도이다. '인간은 자기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헌신의 도약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된다'라로 말한 브레넌 매닝의 말이 다시 한 번 마음에서 속삭이고, 헌신의 도약이란 내게 있어선 다름아닌 '기도'로 해석된다.


주말에 에니어그램 강의가 두 군데 계획돼 있다. 할수록 어렵고, 이번에는 유난히 마음에 부담이 크다. 에니어그램이 너무 좋은 도구라서 사람의 마음과 동기를 잘 보여줘서 어렵다. 그걸 볼수록 나의 죄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정작 나는 그것으로 나를 높이는 도구를 삼는다. 그 지점에서 필요한 건 모든 분석을 멈추고 창조주 그 분 앞에서 무력하고 미미한 존재인 나를 인정하는 기도 밖에는 없다는 것을 다시 경험한다. '기도할 곳이 있을까?' 언제 어디서든 내가 찾아야할 것은 '기도할 곳' 이라고  성령님 내 귀에 속삭여 가르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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