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기독교 세계> 11월호 기고글입니다.(특집 "코로나 블루와 기독교의 역할") 

 

시리게 푸른 하늘과 시시각각 달라지는 구름, 살살 부는 바람. 가을날이 이렇게나 좋았던가요? 길었던 여름의 장마 탓인지.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낯설도록 좋아 자꾸 올려다보게 됩니다. 그때마다 마음의 수면에 오르락내리락하는 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탁 잡아 올리니 이 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푸르기만 합니다.” 나가사키의 엔도슈사쿠 문학관 근처 ‘침묵의 비’에서 본 말입니다. 제 마음에는 내내 이렇게 울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막막한데, 주여, 하늘은 푸르기만 합니다.”

 

올 3월,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낯선 일상이 시작되고, 약속되었던 강의며 일이 하나둘 취소되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세상을 살게 되었지요. 놀라움과 두려움에 “세상에 이런 일이!” “난생처음 겪어보는 일이다.” “평범하게 하던 악수, 일상이 그립다.” 말들이 무성했습니다. 비대면 예배도 충격이었습니다. 이제 그조차 평범한 일상이 된 듯, 묵묵히 살아내고 있습니다. 마스크 쓴 얼굴이 낯설지 않고, 갑갑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불평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어른은 어떻게 견디겠지만 아기들이 그 갑갑한 마스크를 어떻게 쓰나 싶었는데. 웬 걸요! 요즘 아이들은 샤워하고 나와 속옷도 입기 전에 알몸으로 마스크 먼저 쓴다는군요.

 

그날그날 확진자 수를 확인하며, 마스크로 입을 막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경제적 타격이 견딜 만해서가 아니라, 이전 일상이 그립지 않아서가 아니라, 상실이 슬프지 않아서는 아닙니다. 나만 겪는 것 아니고, 나보다 더 아픈 이들이 있으니 그저 견디며 속울음을 삼킵니다. 끝을 예측할 수 없으니 무력할 뿐이고요. 저 고운 가을 하늘이 슬프게 보이는 것은 우울과 무력감이 깔린 일상 때문입니다. 저 투명한 푸르름과 대비되는 블루, 코로나 블루가 우리의 현실이니까요. 고운 하늘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땅의 일상은 이렇게 우울한데, 주님, 하늘은 청명하기만 합니다.”

 

가을 초입에 ‘희망’을 주제로 한 강의나 기고 요청을 연거푸 받았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까칠함을 타고난 편입니다. 사람이든 환경이든 일단 삐딱하게 보게 됩니다. 불편한 것을 빠르게 감지하고, 불편한 것은 결국 말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재밌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긍정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허튼 희망을 말하고 부추기는 자기계발 심리학이나 긍정 신학을 혐오하는 편이고요. 희망을 말하기에 부적절한 성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코로나 19로 하던 일들이 끊어졌고, 경제적 타격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던 3월, 어머니를 천국에 보내드렸습니다. 격리조치로 면회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어머니는 홀로 땅의 마지막 호흡을 내쉬셨습니다. 아쉬움과 상실감으로 가슴이 조여드는 듯하고, 아직도 울지 않고 지나는 날이 없습니다. 이런 제가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요?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이라는 프랑스의 실존철학자가 있습니다. 철학자들의 관심은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 아닌가요. 가브리엘 마르셀은 드물게 희망을 탐색한 철학자입니다. Homo Viator(여행하는 인간) 이란 말을 만들기도 했답니다. 길 위에 있고, 어디론가 가는 중인 인간이죠. 계속 움직여 가고 있지만, 그 끝을 정할 수도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끝을 정하고 창조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라고 철학자는 말합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바이러스 세상을 그저 입 닫고 살아내는 지금,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우선 희망을 욕구나 염원과 구분합니다. 희망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소원하거나 욕구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욕구나 염원은 내 존재 밖에서 있는 것으로, 가질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인데 희망은 그럴 수 없다고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대상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손에 잡을 수도, 쉽게 찾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코로나바이러스의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기다리지만, 그것을 손에 넣는 것 자체가 희망이 아닙니다. 철학자에 의하면 ‘염원’이 이루어졌다고 해야겠지요. 또 희망이란 단순한 감정도 혹은 이성도 아니랍니다. 그러면 희망은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에서 찾아야 한답니까. 철학자는 말합니다. 희망은 인간 실존의 한계 속에서, 인간의 존재에 응답하는 것이라고요. 아, 그렇군요. 희망이 필요할 때만큼 절망적인 상황이 있겠습니까. 실존의 한계, 즉 절망의 극한에서 희망을 떠올리게 되지요. 희망은 희망 없는 곳에서 찾지는 것이겠군요. 그렇다면 저는 누구보다 희망 가까이에 있는 사람입니다.

 

철학자는 말합니다. “나는 희망한다. 그리고 존재한다.” 희망하는 가운데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성도 감정도 아니고, 존재와 함께 하는 것이라면 희망은 신앙의 영역이 아닐까요.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나마 살아내는 것, 막막한 하루를 그저 길을 걷듯 살아내는 것은 이미 희망과 더불어 있음이고요. 인간 존재에 응답하는 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을 찾아 밖을 헤맬 것이 아니라 안으로, 나의 존재로, 내면으로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함께 드리던 예배가 끊어지고, 기도회와 성경공부, 구역모임이 불가능한 지금입니다. 존재와 신앙을 지탱하던 활동들, 외적인 활동이 모두 멈추었습니다. 밖이 아니라 안을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희망의 위기가 아니라 희망을 찾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묻어가던 믿음에서 홀로 있음의 영성을 일구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내몰렸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내몰렸지만 새로운 영성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함께 뜨겁게 드리던 통성기도에서 침묵의 기도로, 모여서 나누고 섬기던 봉사에서 내면을 돌보는 성찰로 옮겨가야 합니다. 희망이 외적 조건에 있지 않다면 필연 그 전제 조건은 믿음입니다. 지난여름 긴 장마 속 하늘을 떠올립니다. 자고 깨어 바라보는 하늘은 늘 먹색이었습니다. 50여 일 그런 하늘이 이어지니 푸른 하늘이 있었던가, 싶기까지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먹구름 너머 하늘은 거기 있었음을 압니다. 그리고 이즈음엔 그 말갛고 투명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번도 사라진 적 없이 거기 있는 하늘. 저는 거기 하늘이 있음을 ‘아는 것’ 너머 ‘믿습니다’.

 

글쓰기 영성 모임 여러 그룹을 이끌고 있습니다.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서 아빠이며 남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분이 글을 쓰셨습니다. 바쁘게 회사 생활하던 분이었어요. 재택근무한 지 벌써 수개월. 어린 세 아이가 있는 집에서 일하는 중이라고요. 수시로 침범해 들어오는 아이들로 일의 능률은 떨어지고, 혼자 시간이라곤 없는 나날이 이어지며 점점 지쳐간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바쁜 회상 생활로 아침저녁 잠시 얼굴을 마주했던 아이들, 아이들을 돌보는 아내의 일상, 그 일상의 실상을 비로소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아내가 이렇게 지냈구나, 싶으니 그간 이해하기 어려웠던 아내의 처지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제는 일상이 된 코로나의 우울, 코로나 블루 속에서도 다른 빛깔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을 발견하신 거고요. 글쓰기는 성찰로 이어지고, 깨달음으로 끝났습니다. 희망은 존재와 함께 있지만 발견되어야 합니다. 어디서요?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자리, 일상에서요.

 

존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 안에 매몰되는 것을 성찰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참된 성찰은 자기 안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건강한 영성은 구심력뿐 아니라 원심력의 균형으로 필연 다시 밖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밖의 저기 먼 곳이 아니라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는 남편과 아내, 아이들이 있는 곳이요. 위 세 아빠처럼 코로나의 현실에 우리 모두 지쳐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세 아빠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쳐가고, 슬픔과 그리움이 몸을 훑고 지나면 우울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쩐지 제게 희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희망, 희망, 하다 보니 희망의 환영이 보이는 걸까요? 아닙니다. 제게 희망은 또렷하고 분명합니다. 제게 희망은 한 사람의 얼굴입니다. 상담과 영성 집단에서 마주하는 한 사람의 얼굴에서 살아갈 의미, 희망을 발견합니다. 치명적 폭력의 흔적을 안고, 살아남기 위해 글을 쓰는 한 사람 때문에 힘을 얻습니다. 부족함 속에서 아프게 성장하고 있는 저의 두 아이가, 무의미한 '소명의 숲'에서 의미를 찾아 몸부림치는 목회자 남편이, 자기도 아프면서 더 아픈 이에게 어깨를 내주고 싶다는 직장 동료가 희망입니다. 결국, 한 사람의 얼굴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막막한데, 주여, 하늘이 저렇게 푸르릅니다. 땅도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 땅의 우울에 하늘의 푸른 희망을 담겠습니다. 제 곁의 한 사람, 그의 눈동자에 비친 푸른 희망으로 오늘을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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