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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을 가진 리뷰

좋은 '현명한 피'는 드물다

larinari 2017.08.01 19:02



작년 이맘 때 기대와 설렘 가득 안고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을 집어 들었었다. 미국 오가는 비행기 독서용으로 선택했는데 결국 1년째 미완의 독서로 남아 있다. 야금야금 하나 씩 어쨌든 눈팅은 다했다고 볼 수 있다. 750 페이지 30여 편을 차례차례 꼼꼼히 읽었다 해도 '미완'의 느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내내 '흠..... 긁적긁적.....' 하는 읽기였으니까. 그러면서도 딱 내려놓을 수 없는 매력으로로 일 년째 '읽고 있는 중'의 도서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와중에 장편 <현명한 피>가 IVP에서 번역돼 나왔다. '다 읽고 사기'의 책구매 원칙을 지키고자 허벅지를 찌르고 있었으나 단편집에서 만난 인생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감동을 복기하고는 홀린듯 장바구니에 담고 말았다. 


내가 이걸 읽으려고 작년에 그렇게 화장실 들어갔다 뒷처리 안 한 느낌으로 플래너리 오코너를 끼고 있었구나! 어쨌든 오코너와의 라포 형성이 충분히 된 덕에 시간적, 정서적 낭비 없이 <현명한 피>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일이 되려면 이렇다. 가방에 든 <현명한 피>의 마지막 챕터 쯤에 책갈피가 꽂혀 있는 시점,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이 이름을 발견! 플래너리 오코너? 장거리 운전으로 몸이 뒤틀릴대로 튀틀리는 순간 팟빵을 털다 얻어 걸린 꿀잼이었다. 이동진은 내게 가끔 새로운 '정보'를 주는 고마운 '님'이지 '페이보릿'은 아니다.  피상적 차원에서 척척 대화가 통하지만 깊은 공감의 대화는 어려울 듯한 친구. 아는 것이 많아 입을 헤 벌리고 듣게 되지만 돌아서면 조금 공허한 그런 친구 같다. 동질성보다 이질성에서 더 많이 배우는 것을 알기에 가끔은 애써서 참으며 듣곤하는데 이번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들었다. 우주가 도와서 플래너리 오코너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느낌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의 주제는 '죄와 구원'에 관한 문제이다. 죄와 구원의 문제는 종교인들의 고민이다. 아니다. 정작 종교인들은 죄와 구원이라는 본질을 고민하진 않는다. 그로 인해 파생된 두려움에 사로잡혀 엄한 곳에서 허튼 희망을 찾는 사람이고, 그 환상을 밑천 삼아 입에 풀칠 하는 사람이다. 죄와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는 자는 구도자, (필연코) '외로운' 구도자일 터.소설의 헤이즐 모리츠는 (아무리 봐도 약간 돌아이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구도자이다. 순회 설교자인 할아버지(독침을 숨기고 다니는 말벌같이, 머릿속에 예수를 담고 세 개 군郡을 운전하며 다녔던 성마른 노인)을 따라다녔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두 살 이 될 때까지는 자신도 역시 설교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모리츠는 '예수를 피하는 길은 죄를 피하는 것'이라는 깊고 검은 침묵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의 설교자가 된다. 자칭 '현명한 피'를 가진 에녹은 또 얼마나 부적응적이고 멍청한 인간인가. 돈을 위해 가짜 맹인 설교자 행세를 하는 호크스가 설파하는 죄와 구원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종교이다. 등장인물 중 적응적 인간은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현명한 피> 안의 죄와 구원은 모두 뒤틀려있다. 각자 나름대로 죄와 구원을 독해하고 배역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현명한 인간이라곤 없다. 현실 속 죄와 구원, 그것을 아우르는 신앙은 어떤가.


대학 친구들 모임에서 목회자인 남편과 관련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수다의 주제가 된 적이 있다. 숨통을 트기 위해 현실도피용으로 가지고 있는 나의 장래희망 카드를 하나 내놓았다. 마침 장래 계획에 관련된 전문가 친구가 둘이 앉아 있었다. 둘 다 크리스천이었는데 한 친구는 자칭 기복신앙에 보수적 신앙관을 가졌다. 목회자에게 잘 하고, 교회 봉사는 일단 열심히 해야 복을 받을 것 같단다. 다른 친구는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서 목회자(부부)에 과도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천하에 상종 못할 부류가 목회자인 것처럼. 재미있는 것은 우리 부부의 조금 파격적인 장래 목회 계획을 들은 두 친구의 반응이다. 자칭 기복주의에 보수적인 신앙을 자처하는 친구는 '너희 자신을 믿지 마라. 너의 남편도 결국 사람이다. 사람 어떻게 별할 지 모르고, 사람 욕심이란 끝고 없다. 쉽게 생각하지 마라.' (집에 있는 뭣도 모르고 단잠 자고 있었을 우리 남편은 의문의 1패)  반면 목회자 알러지 있는 친구는 '신실아, 너라면! 네 남편이라면 무조건 잘 할 거야. 무조건 잘 할 것 같아'였다. (남편 의문의 2패?)


목회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기로 결정한 친구는 제 친구 남편인 목사가 무조건 미덥지 않다. (근거는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이기에) 세상 모든 목사들을 일단 의심하고 보는 친구는 내 친구의 남편인 목사는 무조건 믿을만 하다. (근거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남편이니까)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엉뚱하게도 나는 소설을 읽으며 두 친구를 떠올렸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설파하고 예수를 부정하기 위해 부러 죄를 짓는 사람과, 그에게 죄의 냄새를 맡고 회심을 종용하는 거짓 맹인 설교자. 목사님은 주의 종이니 언터쳐블의 존재라 믿는 것과 모든 목사를 잠재적인 장사꾼으로 보는 것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친구에게서 나는 본다. 맹신 이면의 냉소와 불신, 극단적 불신 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어찌하여 볼 수 있는가, 내 안에 맹신과 불신 / 극단적 불신과 두려움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오코너의 소설이 불편한 이유는 이것이다. 인간 내면의 이 불편하고 불온한 공존의 감정을 확인시키고 또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아니, 해결해준다. 충격적인 방식으로! 단편으로부터 이어지는 오코너 소설의 충격적 결말들은 다시 확인시킨다. 모순과 역설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두 친구는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내 안에 있다. 역자의 말대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내가 이렇게 살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좇는 헤이즐 모리츠의 그로테스크한 삶과 죽음을 따를까 겁이 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오코너가 동시대 개신교의 빗나간 열정을 풍자한 소설이라는 평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신교 천주교가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으로 눈 먼 사람, 종교라는 이름으로 오직 자아숭배에 몰두하는 사람을 직접, 가까이서 경험하지 않고는 이런 인물설정은 가능하지 않다. 아니 결국 자기 안에서 발견했을 테지. 충격적인 소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할머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앎, 자신의 모든 것에 '성찰'이란 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편견을 종교의 이름으로 스스로 세례주어 합리화 한 좋은 나쁜 사람이다. 모든 것을 안다는 무지, 그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적 무지를 한 시도 쉬지 않고 입으로 떠벌떠벌하는 자가 불러온 끔찍한 화를 보며 놀라면서도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심지어 마지막 세 방의 총은 내가 쏘아도 좋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마치 평생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바로 그 일을 부적응자를 통해 대리만족한 느낌. 그녀의 입에서 더는 착한 나쁜 말이 나올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평생 누가 옆에서 1분에 한 번씩 총을 쏴 주었다면 좋은 여자가 됐을 거야"라는 부적응자(범죄자)의 말에 동생의 농담이 떠올랐다. "맞으면 돼. 몇 대 맞으면 돼." 치기 어린 비행청소년의 말을 세기의 소설가가 그로테스크하게 읊는다면 저 대사일 듯. 


헤이즐 모리츠이며, 호크스이고 동시에 착한 나쁜 할머니이며, 그를 쏜 부적응자인 나는 누구인가.

소설가 정이현의 추천사가 이렇게 답한다.


차갑고 가차 없는 시선으로 인간의 모순적 내면을 파헤치고, 읽는 이의 마음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후벼 판다. '어마어마'하다에는 매우 엄숙하고 두렵다는 뜻도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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