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다량의 자랑 물질(남편, 친구, 잉여질 etc.)이 함유된 글입니다. 소화력 약하신 분들, 주의 복용 요합니다.

 

울긋불긋 단풍잎이 아니라 옅은, 투명한 새순의 연둣빛이 눈에 들어오면 어른이 되는 거란다. 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아주 그냥 마음이 왈랑거려 죽겠을 때는 어른의 어른의 어른인가봉가? 저 연둣빛이 처음 눈에 들어왔던 때는 남편과 사귀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다시 만난 그해 4월이었다. 헤어진 지 5개월쯤 지난 어느 날 우연 같은 필연으로 고덕 도서관에서 마주쳤고 그날 고덕의 가로수들은 온통 투명한 연둣빛이었다. '저 색깔 참 예쁘지?'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 좀 해보려고 던졌던 말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변산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는데 내소사 입구에서 본 저 풍경에 좋다, 좋다 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순간을 그대로 마음의 사진첩에 담아두고만 싶었다. 아직 어린아이도 있고, 고3 짜리 아이도 있는 아줌마들이 1박 2일 여행을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유후!!! 하고 자동차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서 들리든 안 들리든 남편들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하였다. 기꺼이 허락해주고, 가서 먹을 것들 장을 봐주고, 집에 있는 아이들을 챙겨주는 남편들을 가진 대한민국 5% 아줌마라며. 

 

특히 내겐 치유적이기까지 한 일이다. 지금에야 엄마의 걱정과 염려인 줄 (심지어 엄마 딴에는 사랑인 줄도) 알겠으나 내가 하는 무슨 일에든 부정적인 추임새를 넣는 우리 엄마의 목소리는 아주 그냥 징글징글하다. '돈 들고 피곤한데 여행을 왜 가니?' '필요 없는 걸 왜 사니?' '몸에 나쁜 커피를 왜 마시니?' '그럴 줄 알았다' '이랬어야지 저랬냐?' '저랬어야지 이랬냐?' 이 목소리 때문에 뭘 해도, 특히 내가 좋아하는 뭔가를 할 때는 더더욱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 병을 고쳐준 것이 남편이다. '그래, 해' '갔다 와' '해! 해!' '사!' 이 사람은 내가 뭘 해도 안 된다 하는 게 없네. 왜 이러지? 날 시험하나? 긴장한 적도 있었으나 의심이 믿음이 되면서 내가 나를 수용하는 일에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치유적이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 '어디쯤 가고 있냐? 그럴 줄 알았어. 서둘러 가서 거기서 놀아야지. 그러다 실내에만 있다 오겠네' 이런 사소한 전화조차도 내게는 지지와 격려로 들려 한 개 더 좋은 여행이었다.

 

 

 

 

 

저녁 무렵에 내소사에 들어가기로 한 건 정말이지 최고의 선택이었다. 젊은 시절에 읽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효과로 벌써 내소사에 몇 번 째인지 모른다. 저녁 빛 때문인지, 중년의 빛이 화사한 친구들 덕분인지 전혀 새로운 내소사를 경험하고 왔다. 총 30시간의 여행이었는데 잠자는 시간 5시간 빼고 25시간 수다를 떨었다. 내가 혼자 15시간 이상 떠들어댔고, 나머지 시간도 딱히 입을 닫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한 아줌은 만난 지 20여 년, 다른 아줌은 알게 된 지 불과 2년. 20년, 2년, 인연? 참 좋은 인연들, 인연들!ㅋㅋㅋㅋ 세상의 모든 며느리 대동단결 시키는 시어머니 얘기, 남편 흉보기, 살아온 얘기, 첫사랑 얘기, 꿈 얘기, 농담 따먹기. 결론은 '건강하게 늙자!' 나이 먹어서 며느리 괴롭히지 말고, 자식들 부담 주지 말고, 우리끼리 잘 놀자. 무료 지하철 타고 백화점 지하에서 만나서 함께 죽 먹으면서 지내자. 그 정도로만 건강하자. 우리는 죽먹고우!

 

 

 

 

 

죽먹고우, 좋지! 그러나 내일 일을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노년에 대해 무엇을 장담할 수 있을까? 이튿날 아점으로 백합죽을 함께 먹었으니 죽먹고우는 된 거고. 오늘 함께 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누릴 뿐이다. 내가 나를 다 아는 것 같지만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 없으면 내가 아는 나는 반쪽 아니, 1/4 쪽? 아니 1/90 쪽 정도 일지 모른다. 저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면서 내게도 있던 그 좋은 점을 알게 되고, 때로 불편해하면서 내가 모르던 나의 가시를 알게 된다. 좋은 것도 불편한 것도 내게 있다는 것을 존재로 비춰주는 거울 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부끄럼 없이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우리'라서 말이다. 참 좋은 인연들! ㅎㅎㅎㅎ '주를 알게 하소서, 나를 알게 하소서(Novem te, novem me)' 함께 이런 기도를 드리며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함께 걷는 이 마음의 여정이 1박 2일 지치지도 않는 수다 여행만큼이나 좋다. 이 아줌마들. 피부관리 할 줄도 모르고,, 오케이 캐쉬백 포인트, 뭔 포인트든 쌓을 줄도, 활용할 줄도 모르지만.... 그래도 좋댄다. 마냥 좋댄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저 고상한 것들을 꼬드겨서 찍은 엽기사진이 있으나 공개할 수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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