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꿈을 꿨다.

 

캄캄한 골목길을 통해 집으로 간다. 모퉁이를 돌아 몇 발짝 올라가서 우리 집이다. 작고 깔끔한 느낌이 일본식 집을 연상시킨다. 조금 낮은 곳으로 마주 보는 집이 있다. 우리 집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 동네다. 그 집에 사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엄마에 관한 얘기를 나눈다. 엄마를 존경한다는 그런 비슷한 얘길 한다. 엄마가 동네에서 대체로 그런 평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집에 들어갔는데 한복(옷고름 없는, 브로치로 고정시키는 단출한 한복)을 입은 엄마가 노트북 앞에 있다. '선교'에 관한 글을 써야 하는데 잘 안 써진다고 한다. 낯설게 젊고, 말이 없고, 지적인 느낌의 엄마다. 나는 아까 젊은 여자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엄마 때매 챙피해 죽겠어"라고 말한다. 엄마에 대한 호평이 좋다는 뜻인데 조금 장난스럽게 돌려서, 꼬아서 말하는 것이다.

 

잠을 깬 후에 꿈 속 마지막 말에 붙들렸다. 챙피해 죽겠어! 꿈 자아의 마음, 본의는 그게 아니다. 자랑스러워, 라거나 엄마 인기가 좋으니 덩달아 좋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 좋은 걸 좋다고 하고, 자랑스러운 걸 자랑스럽다고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될 것을. 왜 그러지 못했을까. 꿈속의 나는!(의식의 나도! 왜 그러지 못할까) 지난번 꿈에서는 시간이 별로 없는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었고, 나는 또 예의 그 장난스러운 태도로 설레발 하다 엄마가 하고 싶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엄마를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는 태도가 비슷하다. 감정을 있는 대로 느껴 머무르지 못하고 가벼운 농담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비슷하다. 평생, 특히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내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였다. 귀나 눈의 감각이 둔해져서 못 알아듣고 실수하는 엄마를 보며 깔깔거렸다. 실수들이 정말 귀엽고 재밌기도 했지만, 몸으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노화 증상을 거부하고 회피하고 싶은 방어였다. 희화시키고, 농담과 유머로 대체하는 것이 내겐 가장 익숙한 방어기제이다. 

    

'엄마 때매 창피해 죽겠는' 느낌은 철들기 전 나를 지배하는 일상적 감정이었다. 엄마가 늘 창피했다. 버스에 타서 자리 맡기 위해 빛의 속도로 움직이던 엄마, 자리를 맡고 앉아 "신실아" 엄마의 큰 목소리. 물건 사러 가서 집요하게 깎기. 이런 창피함이야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너무나 흔한 부끄러움이지만 웃음만 나올 뿐이다. 제 부모가 하는 모든 것에 짜증내고 창피해하는 것이 사춘기 증상이니까. 그런데 어쩐지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사춘기, 청소년기 다 지나고 나름 성인이라고 자부하는 때였다.

 

엄마에겐 철야기도가 일상이었다. 매주 금요일 철야기도 외에도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 9월엔 한 달 내내 철야였다. 대학생 때 작은 교회 주일학교 교사를 했는데 전담 목회자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 주변에 있던 교회 주일학교 교사 연합회 모임에 나가 찬송 율동 레크리에이션 정보를 교환하곤 했다. 그들과 어울려 놀며 늦은 시간 함께 동네를 걷고 있었다. 저 멀리 옷 무더기 같은 엄마가 걸어왔다. 겨울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갈 때는 옷을 입고 또 입고, 그 위에 또 입고는 하셨다. 엄마가 벗어 놓은 옷이나, 입고 움직이는 모양이 다를 바 없이 그냥 옷 무더기였다. 밖에서 엄마를 만나면 '창피함 관성'이 있어서 일단 흠칫하곤 했지만 철이 든 때였다. 흠칫, 이후에는 반갑기도 했다. 가까이 오면 장난 치며 아는 척하려고 했다. 할 수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멀리서 걸어오는 엄마를 보고 "저 할머니 분명히 철야기도 가신다." 하며 웃었다. 아무렇지 않았던 마음이 순간 요동치며 고개를 돌리고 엄마를 지나쳐 버렸다. 창피하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그 장면은 왜 이리 지워지지 않을까.

 

엄마가 창피한 이유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엄마의 늙음이 무엇보다 창피했다. "너네 할머니 왔다" 이런 말은 들어본 적 없지만(동생은 많이 들었다고 한다. 나는 엄마 나이 마흔 다섯에, 동생은 마흔일곱에 태어났다.) 동화 같은 데서 읽으면 다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늙어서 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늦게 낳은 딸이라 나름대로 예쁘게 키우려 했던 것 같은데 뭔가 늘 이상했다. 분수 머리가 유행하던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묶어준 머리는 어딘가 친구들과 달랐고 어설펐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엄마의 사명은 오직 남매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콩나물 장사를 허드라도 서울로 가야겄다, 애들 공부시키는 방법은 서울로 가는 거 밲이는 옶다" 하고 무작정 이사를 결정했다. 교육비와 최소한의 생활비 외에 돈을 쓰지 않는 방식으로 살았다. 욕구가 많고 다양한 나는 그런 엄마가 힘들었고 창피했다. 대학에 들어간 딸에게 정장 한 벌을 사주지 않았다. 대학 신입생 때 종로 어느 구두가게를 지나다 노란 구두를 봤는데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몇 날 며칠 엄마에게 사달라 졸랐다. 엄마의 뇌엔 다음 학기 등록금밖에 없었는데 노란 구두 같은 것은 입력이 될 리 없지. 결국 내가 모은 돈으로 노란 구두를 사고야 말았지만  발이 아파 몇 번 신지도 못했고.

 

가장 답답한 것은 신앙생활이었다. "주일에 물건 사면 안 된다. 새옷을 사면 주일에 먼저 입어야 한다. 교만하지 마라. 니가 잘나서 된 것 아니다. 다 하나님 은혜다. 믿는 사람이 미운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너 기도 안 허지?" 작년에 낸 『신앙 사춘기』에 '종교중독'이라 언표 했다. 그렇게 이름 붙이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 지난한 싸움의 시간이었던가. 젊은 날엔 엄마와 얼굴을 맞대고, 이후엔 내 마음 엄마 목소리와 싸웠다. 『신앙 사춘기』로 얻은 것이 있다면 그런 엄마를 팔아먹은 대가다. 그 글을 한 편 한 편에 담긴 눈물은 엄마 팔아먹는 딸년의 참회의 눈물이기도 했다. 평생 가장 벗어나고 싶고 극복하고 싶었던 엄마, 엄마의 종교 중독이 나를 만들었고 나는 그 사연을 팔아 글을 썼다. 가장 부끄러운 건 내 안의 종교 중독이었건만 '종교 중독자'라 이름 붙여 엄마를 총알받이로 내세웠다. 그 책이 나올 즈음 엄마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리고 설명하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엄마의 귀와 눈과 뇌는 별 일 없다, 다들 건강하다, 잘 지낸다는 소식으로 족했다. 아니 이전부터도 엄마에게 출간 소식을 알리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이 내게는 목숨 같은 일이지만 엄마에겐 별 일이 아니다. 엄마에게 유일한 책은 성경이고, 평생 의미 있는 활자란 성경과 찬송 뿐이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엄마가 1년에 한 번, 어떤 때는 그 이상 성경통독을 한다는 것이 차라리 기적 같은 일이다. 성경 외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인생이다. 

 

나도 엄마가 되었고, 어떻게 해도 아이에게 부족함의 공간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의 엄마 됨이 아이들에게 결핍과 상처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새로운 아픔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엄마인 나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엄마가 내게 했던 정반대로 한다 해서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 엄마에게 느낀 결핍감에 매여 엄마 노릇할수록 아이와는 더 멀어진다. "엄마는 할머니한테 이런 걸 받아본 적이 없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 거냐" 최악의 말이다. 이걸 채워주느라 저쪽에 구멍을 내고, 저 구멍 메우느라 여길 놓치는 것이다. 엄마보다 많이 배웠고, 합리적 신앙을 가졌고, 센스가 넘치더라도 아이들의 모든 욕구를 채워줄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원죄는 결핍감의 대물림인지 모른다. 결핍감이 낳는 갈망, 깊은 갈망, 무엇으로도 채워질 것 같지 않은 갈망. 다시 말하면 부모는 창피한 존재이다. 어느 부모랄 것 없이 부모는 자식의 부끄러움이다. 마음공부하고 일을 하며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비로소 우리 엄마의 모든 것이 창피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창피하지만 그건 정상이다.

 

꿈에서 엄마는 노트북을 앞에 두고 글을 쓰고 있다. 무의식의 세계, 꿈에서나 가능한 장면이다. 노트북과 엄마, 글을 쓰는 엄마란 죽었다 깨어나도...... 아, 엄마는 지금 죽었다 깨어난 건가? 꿈 얘길 했더니 남편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 어머님은 천국에서 당신이 살아오신 인생을 쓰고 계신가보다." 그렇게 상상해볼까? 죽음 직전까지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고, 인생 가장 소중하게 붙든 말씀과 찬양을 잊지 않았던 엄마다. 노인이 될수록 허튼 말이 줄고 지혜가 빛이 났었다. 그랬던 엄마지만 지성의 결핍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땅을 살았던 엄마의 치명적 한계였다. 사고로 멍든 얼굴, 인공관절로 겨우 버티던 걸음걸이, 골다공증으로 칼슘 다 빠져나간 몸과 함께 이 땅에선 극복할 수 없었던 한계다. 몸을 벗은 빛나는 영혼은 못 배운 한, 지성의 결핍까지도 말끔히 지워진 새로운 모습일까. 그럴까. 부디 그러하기를! 엄마가 천국에서 글을 쓰면 좋겠다. 빛나는 천국에서 그 무엇보다 엄마의 지성이 빛났으면 좋겠다.

 

꿈이 드러낸 내가 모르던 마음, 모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극복했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엄마가 창피한 것이다. 아니, 엄마와 연결된 나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엄마가 아니다. 엄마로 치환된 나의 어느 부분이다. 믿어질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의 글, 나의 지적인 기반이 늘 부끄럽다. 뿌리 없는 지성이라 생각한다. 수치심과 결핍감은 끝없이 온라인 서점을 들락거리는 것으로, 불안과 혼란이 올 때마다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으로, 이 학교 저 학교 박사과정을 서핑하고 다니는 것으로, 어떤 사람들의 글을 질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잘 배운 엄마에게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한다. 아무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고, 맘껏 공부해서 유학도 갈 수 있었다면. 그랬으면 어땠을까. 이 유치한 상상을 자주 하는 것은 존재 깊은 곳의 수치심이다. 엄마에 대한 창피함이라고 하기엔 너무 뿌리 깊은...... 그냥 내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것을 꿈이 드러내고 마주하게 한다. "엄마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가 아니다. 나다. 나 때문에 챙피해 죽겠는 거다. 심플한 한복을 입고, 늙지도 젊지도 않은 엄마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표정으로 글을 쓰는 모습이 숭고하게 다가온다. 내 엄마다. 내 안에 그런 엄마도 있다.

 

내가 몰랐거나 인정하지 않았던 엄마가 있다. 야학에서 공부하던 얘길 엄마가 자주 했었다. 수학을 배우는데 십의 자리 뺄셈 배우는 날에 결석했다고 했다. 다음 시간에 가서 시험을 치는데 배우진 않았지만, '가만히 생각해봉게 앞이서 꿔다 쓰면 되겄다 싶어' 그렇게 풀었단다. 배우지도 않고 100점을 맞았다고, "옥금이가 보통 비상헌 머리가 아니다"라고 선생님이 칭찬을 했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서울에 왔을 때 아버지 양복을 하려고 뒀던 천으로 엄마가 투피스를 맞춰 입은 적이 있다. 그레이 색 천의 재킷과 스커트는 지금 생각해보면 'KEITH' 느낌이 나는 세련된 투피스였다. 비단 장사를 하던 엄마가 남는 천으로 한복을 해 입으면 교인 중 어떤 집사님들이 그렇게 질투를 하더라고 했다. 늙고 무식하고 감각 없는 엄마보다 내가 몰랐던 엄마가 더 광활할지 모른다. 꿈은 내 수치심에 가둬둔 엄마를 다시 만나라고 말한다. 아니 꿈의 엄마가 새롭게 만나자고 말 걸어온다. 다른 엄마를 만나봐야겠다. 슬픔고 죄책감을 피하지 않고, 애도의 시간에 오롯이 머물며 새 엄마를 만나야겠다. 필연, 엄마가 아니라 다른 나와의 만남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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