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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정

천주교와 개신교의 화평한 조우

larinari 2012. 4. 13. 09:36

 





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지난 몇 년, 내가 속한 개신교 아닌 천주교의 성인들과 신부님들의 가르침과 책을 통해서 영성의 샘물을 마시는 시간들이었다. 기도원이 아닌 수녀원, 통성기도가 아닌 침묵으로 1년에 한 두 번 피정을 통해서 생전 처음 기도를 배우는 아이처럼, 생전 처음 예배하는 아이처럼 기도와 미사에 앉아 있곤 했었다.
울트라 정통 보수 대한 예수고 장로회 합동 출신의 우리 엄마가 알면 '얼라, 천주교가 이단 아녀. 얘가 미쳤네' 하셨을 것이고. 내가 속했던 교회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행보다.


2.
'주님, 이거 주세요. 저거 필요해요. 아, 이건 제가 잘 모르겠으니까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그리고... 암..... 또 뭐더라..... '
기도는 하나님께 뭘 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 그 분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배웠지만. 정작 내 기도는 요구사항 늘어놓기가 끝나면, 조금 정직하게 내 맘의 복잡한 실타래를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만큼 내놓고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쩝쩝거리는 그런 나날이 오래되면서부터였다.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이 찬양 참 좋아하는데 기도 속에서 깊이 그런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있지만 길을 알 수 없는 그런 시절이었다.

알 수 없는 신비에 이끌려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가톨릭영성을 접하고, 여러 번의 침묵피정을 통해서 비로소 정직한 기도, 듣는기도, 쉬지 않고 하는 기도를 조금 알게 되었다.


3.
살아갈수록 삶은 신비에 가깝다.
애를 써서 선택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저 깊은 기도에 대한 갈망만 붙들고 있었는데 어느 새 나는 처음에서 멀리 와 있었다. 내게 익숙하지 않는 가톨릭 예전의 언어들, 형식들 속에서 때로 어리둥절 했다. 그리고 그 낯설음이 버거웠던 어느 어느 경당에 앉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 이 낯선 곳에선 난 뭘 하고 있는 걸까? 내가 배운 신앙의 전통이 있는데 왜 거기선 내게 기도를 가르쳐주지 않는거지?' 동냥젖을 얻어 먹는 아기처럼 배고파 정신없이 먹지만 마음까지 편안한 건 아니었다.


4.
게다가 목회자 사모인 나는 '보여주기 위한 기도'에 대한 압박을 많이 받았다. 자아가 강한 난 그런 강요에 순순히 굴하지 않았고 남편 역시 '당신이 기도하고 싶을 때 새벽기도 가라'며 그로서는 하기 힘든 지지를 해주었다.
그렇다고 당당한 것은 아니었다. 꼬박꼬박 새벽기도 하지 않는 사모는 '기도하지 않는 사모'이고 그런 사모는 남편에 도움이 안되는 결정적 결격사유를 가진 자였다. 그런 목소리가 밖인지 안에서인지 늘 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난 정말 나쁜, 잘못된, 사모에다가 천주교에 물든 부족하기 까지한 사모였다.


5.
교회 주변을 걷다가 양화진 책방 앞에 섰다. 책방 유리에 새겨진 글에 눈이 번쩍한다.
'이래저래 양화진은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그 이야기 중,
천주교와 개신교의 화평한 조우를 모두어
양화진 책방을 열었다'
양화진 책방을 운영하는 홍성사의 정신과 100주년 기념교회의 영성은 같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다. 어쩌다보니 나 '천주교외 개신교의 화평한 조우'를 꿈꾸는 그런 곳에 몸과 마음과 영성의 뿌리를 세우게 되었다.


6.
이것은 참으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세밀한 위로이고,
다시 그 분 앞에 조용히 무릎 꿇어 기도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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