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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성, 답은 없다. 길은 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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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성, 답은 없다. 길은 있다.

larinari 2014. 1. 3. 23:00

 

**  학복협에서 발간하는 <물근원을 맑게>에 기고한 글입니다.

 

한낮의 연애 고민, 밤중의 성 고민

제가 청년들에게 받는 가장 흔한 질문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사람인지 어떻게 알아요?’ 입니다. ‘최근에 소개팅한 사람이 이런 사람이고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이 정도 마음인데 제 짝일까요?’ ‘그다지 설레진 않지만 만나면 편안한 사람이 있어요. 대시를 해왔는데 하나님이 주신 사람인지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나요?’ ‘아직 사람을 제대로 사귀어 본 적도 없지만 내 짝인지 확인하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요?’ 상황에 따라서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내 짝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를 찾는 방법’이라고 표현하며 괜히 더 있어 보이고 왠지 괜찮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드네요. 여하튼 이것은 제가 공개석상에서 받는 대표적인 질문입니다. 말하자면 연애강사가 한낮, 밝을 때 받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밤의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수 년 전에 청년들이 보는 잡지에 연애 관련 글을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즈음 독자들로부터 많은 상담 메일을 받았습니다. 물론 강의를 마친 후에 무선 마이크를 통해 듣는 질문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대략 예상이 되시겠지만 스킨십이나 성에 관련된 문제가 바로 밤의 질문입니다. 이런 상담은 비신자와 교제하는 이들보다는 이른바 CC, 즉 교회 내에서 사귀는 커플이 대부분입니다. 상황과 처지는 다 다르지만 결국에 성관계 후의 죄책감, 상대에 대한 분노, 두려움 등으로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안타까운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이것을 어디에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고요. 때문에 이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하는 등 외적인 일상을 유지해가는 것입니다. 여전히 찬양팀 싱어를 하고 조장으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죄책감은 더 커집니다. 분열적인 시간이 오래 가면서 이 부자연스러움마저 습관이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청년의 고뇌, 청년부 목사님의 딜레머

해맑은 표정으로 ‘내 짝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어요?’라고 묻는 청년과 장문의 비밀 메일을 보내온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청년이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한낮의 청년과 밤중의 청년은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적어도 완전히 다른 부류라고 따로 줄을 세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낮과 밤의 다른 고민, 바로 우리 시대 크리스천들의 이성 문제를 보여주는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기독청년들이 일찍이 성경험을 했다.’는 식의 통계, 이면에 눈여겨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몇 살에 성경험 몇%’는 그저 수치가 아니라 인격이고, 얼굴을 가진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입니다. 확신에 찬 모습으로 교회 생활하는 청년부 회장, 믿음 좋은 선배들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몇 시간이고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수련회 꼭 가자고 설득하며 열정을 다하는 모습과 달리 연애 문제로 가면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욕망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분열된 삶을 철저하게 숨기고 살든, 극심한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든 어쨌든 교회에만 오면 다시 멀쩡한 새벽이슬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청년부를 지도하시는 목사님께도, 청년들 자신에게도 이 불편한 진실이 특별히 새로운 사실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어제 오늘 일도 아닙니다. 청년부 지도 목사님이 싱글이던 때도, 아니 담임 목사님이 총각으로 선을 보러 다니실 때도 어느 구석에선가 있었을 법한 문제입니다. 그래도 그 시대에는 ‘어디! 혼전 성관계를! 게다가 임신을?’ 하면서 징계를 하거나 지옥에 떨어질 사탄의 자식쯤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했다면, 요즘은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내 몸의 주인은 나’라며 내가 선택한 섹스, 책임질 수만 있으면 되니 당당해지라는 목소리가 교회 안팎으로 커졌습니다. 여기다 대고 어설프게 혼전순결이니 하는 말로 조언을 하거나 책망하다간 감각 없고 촌스러운 꼰대가 되기 십상이니 청년부를 지도하는 목사님이나 저 같이 어설픈 강사들에게 참 곤혹스러운 시대입니다. 청년들은 그들대로 성에 있어서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지도자들은 그들대로 원칙만 들이댈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없는 이유가 복잡하게 엉켜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맞닥뜨린 문제는 한 없이 복잡한데, 끊어버리려고 해도 잘 되지 않고 그럴수록 좌절은 더 깊어 가는데 교회에서 듣는 지침은 혼전 성관계 안 된다는 원칙뿐이라면 더더욱 입을 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고민은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올 문제가 아니라 여기기 십상이니, 더욱 길을 잃고 몸이 이끄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둘 밖에요. 그렇다고 목사님이 동아리 선배 형도 아닌데 청년회장이 여자 친구와 일박 여행 갔다 왔던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입술의 고백 속 하나님, 뇌구조 속 하나님

생년월일과 성별을 입력하면 뇌구조를 그려주는 스마트폰 앱이 있더군요. 별 기대 없이 입력했는데 완전 공감 뇌구조 그림이 나왔다며 자신의 SNS에 공유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실 그 정도 뇌구조는 나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특히 싱글 청년들의 뇌구조라면 더욱 자신 있습니다. 뇌를 거의 다 채울 만큼 큰 영역을 그리고 거기에 ‘연애하고 싶다.’ ‘올 크리스마스도 솔로란 말인가’ ‘내 짝은 어디에?’ 등 연애에 관한 내용을 넣어줍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에 대충 취업, 다이어트, 여행가고 싶다, 이런 정도 끼워 넣어주면 공감 터지는 건 시간문제죠. 발달 심리학자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청년기는 이성을 향한 에로스(eros) 에너지 충만한 시기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청년의 믿음은 새벽기도나 단기선교 참여 회수, 조장 경력 등이 아니라 어떻게 연애하고, 헤어지고, 짝사랑하고 거절당하느냐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불과 몇 시간 전 하늘의 방언과도 같은 아름다운 말로 사람들을 찬양으로 초청했던 교회 오빠가 모든 순서 마치고 데이트 자리로 가면 이 몸과 세상 간 곳 없고 여친의 몸만 보이는 상태가 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품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뭐 그리 문제가 되겠습니까. 생각과 말에는 충만한 하나님이 데이트 자리에서는 도통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 그 괴리가 문제라면 문제이지요.

외모지상주의,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자매의 외모만 보는, 형제들의 경제력을 최우선으로 보는 청년들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자 외모를 봐요.’ 또는 ‘내게는 남자 경제력이 중요해요. 저는 하나님도 좋지만 정말 명품가방 없이 살 수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배우자 일 순위는 물론 신앙이에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선택은 늘 외모이거나 경제력인 청년들보다 여러 모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일단 결혼 가능성은 물론이고 심지어 신앙 성숙의 가능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인 문제로 자매들의 상담을 받았을 때의 흔한 스토리-예를 들어 어떤 교회 오빠와 지속적인 성관계를 가졌고 심지어 임신하고 중절한 경험도 있었는데 오빠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른 자매와 교제하는데 이전의 관계를 발설할 수 없다. 누워서 침 뱉기이고 여자인 나 자신을 스스로 매장하는 것 아니냐. 억울함과 분노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의 남자주인공은 날날이 신자인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과 남성적 매력을 겸비한 킹카 회장 오빠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름대로 건전하고 건강하게 데이트 한다는 커플도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렇게 꼬장꼬장한 오빠가 데이트할 때만 되면 더 깊은 스킨십을 요구하고, 한두 번 거절하는 것이 반복되면 싸움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싸우고 나서 대화로 해결하자고 마주 않았는데 ‘나는 대화 필요 없어. 니가 뽀뽀만 해주면 다 해결 돼.’ 라고 말하는 오빠는 개그 콘서트의 ‘남자가 필요 없는 이유’의 보통남자만이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자는 것입니다.


밝은 곳으로 나와야 할 기독청년들의 성

혼전 성관계, 임신 등의 문제가 더 이상 교회 밖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일날 교회는 나오지만 주중에 어떤 애들을 만나고 어떻게 놀고 사는 지 뻔히 보이는, 내놓은 자식 같은 집중 케어 대상 청년들이 아니라 청년부 임원, 리더들의 현안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다른 동네, 잘 사는 동네, 큰 교회 얘기지. 우리 청년부는 그 정도 아니다’라 믿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요. 그리하여 수련회의 한 프로그램으로, 한 텀의 성경공부 주제로 ‘성’이 자연스럽게 밝은 곳으로 나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지금 하는 짓도 충분히 망나닌데 그런 애들에게 마당을 깔아주자는 것이냐, 신앙생활 잘 하는 순진한 애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면 어떡하나, 두려운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청년들의 입으로 자신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인 성문제를 교회에서 얘기할 수 있는 마당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잘 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지만 더 자주, 더 격렬하게 청년들 스스로 토론해야 하고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소신 있는 가르침을 위해 공부하고 전해야 하고요. 주일 저녁 임원회를 하고 은혜롭게 기도회를 마친 청년회장과 부회장이 그 날 늦은 밤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록 제가 연애 강의를 하지만 저는 연애 문제에 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디 연애뿐이겠습니까.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고 기질이 다른데 짧은 질문을 듣고 ‘지금 이 순간에 대시를 해라. 그 사람과는 헤어져라. 대화의 기술을 익혀라. 좀 더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꿔라.’ 이런 답을 주는 것들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문제에는 쉬운 답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 답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고, 신앙의 여정입니다. 백이면 백 사람에게 각각 다른 길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문에 복잡한 문제를 푸는 좋은 방법은 ‘이건 어려운 문제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연애, 게다가 거기에 성문제가 얽히면, 게다가 크리스천 남녀의 문제라면 정말 복잡한 문제입니다. 어렵다는 전제와 더불어 당사자인 두 사람에게 매우 아픈 일이라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끊지 못하는 성관계 뒤에는 아마도 결핍된 사랑에 대한 목마름과 얻은 사랑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을지 모릅니다.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방법이 인격이 아니라 몸뿐이라고 애초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문제가 불거지면 쯧쯧 혀를 차며 ‘다른 형제자매들이 알고 영향 받을까 무섭다.’가 아니라 참 어려운 문제를 아프게 겪고 있구나. 라고 바라봐주는 시각이 있어야 이 문제들이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말하게 해야

쉽지는 않습니다. 성에 관한 고민을 꺼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행사 하나도 조심스러운 것이 교회 안 현실입니다. 청년부 수련회에서 성문제에 관해서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는 프로그램을 가진다 합시다. 프로그램이 알려지기기 무섭게 당장 교회 어르신 들이 걱정 하실 것입니다. 어찌 은혜 받으러 가는 수련회에서 성을 논한단 말인가. 청년 시절 성에 관한 고민, 죄책감 등을 내놓고 다루어 본 적이 없으신, 아니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으셨던 어른들로서는 당연한 걱정일지 모릅니다. 순결 서약식이나 하면 아름다운 일이라 박수를 쳐 주시겠지만요. 순결 서약식 같은 것으로 청년들 개개인의 성이 통제될 거라고 믿는 것은 믿음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것 아닌가 싶습니다. 때로 결단하는 것도 필요하고 여러 사람 앞에서의 공증 세러모니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결단의 주체인 청년들로 시작되어야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향식 행사로서의 순결 서약식과 거기서 끼워주는 서약반지는 더 큰 죄책감의 올무가 되기 십상입니다. 청년들이 연애, 특히 성에 관한 고민을 말할 수 있는 안전한 자리가 교회 안에 꼭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수련회 프로그램이 됐든, 결혼한 선배 집의 거실이 됐든, 보다 적극적으로 이런 자리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나도 모르겠는 내 마음, 그래서 잘 통제가 되지 않는 내 행동은 이름붙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아직 싱글인 청년이 주일 아침부터 교회에 나가 예배, 주일학교 봉사, 조모임, 뒷풀이 까지 마치고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갈 때의 느낌을 아시나요. 마음에 부는 한 줄기 차가운 바람. 강의 중에 이 얘길 하면 여기저기서 공감의 웃음이 큭큭 새어나옵니다. 느낌 아니까요. 이때의 느낌이 ‘외로움’이고 이것은 전혀 나쁘거나 잘못된 감정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싱글이라서 느끼는 당연한 감정이고, 어쩌면 하나님이 아담의 뒷모습을 보고 읽으셨을 느낌-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이었을 것이라고요. 이렇듯 이름을 붙인 감정들에는 이유 없이 압도되거나 끌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성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입 밖으로 꺼내고 이름을 붙여놓으면 조금 더 다루기 쉬워집니다. 그러기 위한 마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다루지 않거나, 다른 순진한 아이들까지 물들일까봐 쉬쉬하는 것은 결국 청년기의 이 중요한 문제를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게 만들 것입니다.

무엇보다 청년부 지도교역자들에게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청년의 시기는 성욕이 넘치는 시기인데 그렇다고 그 욕구를 채울 수 없으니 운동 같은 걸 열심히 하거나 그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는 꽤 오래된 교회 내 처방이 있습니다. 단기선교, 수련회 준비, 교회 큰 행사의 스텝봉사 등으로 쉴 틈 없이 젊음을 불태우는 것도 하나의 처방이라고 합니다. 일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압도되는 에너지가 운동을 한다고 사라지겠습니까. 땀 흘려 운동하고 기분 좋게 샤워하고 자려고 누운 밤 스멀스멀 올라오는 욕구는 어쩌구요. 주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없이 봉사하며 지내고 돌아와 누운 밤, 외로움과 함께 고개를 드는 욕구는요. 선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키는 젊음의 에너지도 좋지만 자칫 승화 아닌 회피가 되어 사랑하는 청년들이 죄책감과 고뇌로 혼자 외로운 곳에 버려지지는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런 청년들을 위해 청년부 목사님들께서 사랑의 용기를 내셔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1년에 몇 번이라도 스킨십, 성을 주제로 설교를 하시고, 때로 꼰대 소리를 듣더라도 준엄하게 꾸짖으시고, 청년들의 상처 난 몸과 마음을 붙들고 함께 우시면서 정면으로 돌파하셨으면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런 노력이 이 시대 청년사역을 하시는 목회자분들께서 맡으신 몫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데이트 하는 청년이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빠가 널 정말 사랑해서 너와 자고 싶은 거야.’ 가 아니라 ‘오빠가 정말 너를 사랑해서 참을게. 도와줘.’라고요. 지금 여기서 자신의 연애와 성문제를 진지하게 복음에 비춰 고민하는 청년들이 장차 결혼해서는 좋은 부부관계를 위해 고민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아이를 양육을 하면서는 성적으로 줄 세우는 세상에서 어떻게 키우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부모의 삶일까를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욕구하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정직하게 만남이며 제자도란 삶의 자리 바로 거기에서의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청년들 스스로 고민하는 힘을 키워주고, 질문을 던지게 하고 목사님들 역시 치열하게 함께 고민하며 전하는 설교.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 믿습니다.


답은 없지만 길은 있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고 신대원에 들어간 남편이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전도사님들의 고민도 별다른 것이 아니라서 데이트하며 겪는 스킨십 문제로 찾아와 상담하는 후배가 있었다고 합니다. 주말이 와 설렘 반 고뇌 반으로 데이트를 향해 가는 전도사님에게 남편이 그랬답니다. ‘정 그러면 이번 주말에 목표를 하나 세우고 지키고 와라. 데이트 하며 뽀뽀하되 손을 옷 안으로 집어넣지 마.’ 한 번의 데이트에서 그 정도는 지킬 수 있게다 싶어 흔쾌히 받아들이고 가셨나보죠. 월요일에 남편의 기숙사방에 들어서는 전도사님이 팔을 내밀며 하는 말이 ‘형, 제 손을 잘라주세요.’였답니다. 이 전도사님 지금은 목사님이 되셨고 결혼하여 아이의 아빠가 되셨는데요. 모르긴 해도 그때 그 경험과 고민이 지금 하시는 청년사역에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하며 혼자 미소 짓곤 합니다.
수도원이 아니라 먹고 자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삶의 에너지가 정점을 찍는 청년시절은 그래서 더욱 방황의 연속일 것입니다. 이 복잡한 삶의 문제에서 쉬운 답을 찾자면 오히려 한 없이 어려워지고 꼬이고 죄책감에 허덕이게 되어 있습니다. 쉬운 답은 없지만 남과 다른 나만의 길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렵기만 한 성문제 역시 답을 찾아 고민하고 때로 좌절하면서도 나만의 길을 가는 것, 스스로 주체가 되어 통과할 여정입니다. 청년들은 찾아나서야 하고 선배와 지도자들은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정답은 없지만 길은 있을 것입니다.

정신실 : 음악치료사, 늦깎이 목사의 아내, 일상에 숨겨진 영원의 빛을 보는 맑은 눈을 선망하는 두 아이의 엄마다. 「오우 연애」 「와우 결혼」(이상 죠이선교회)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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