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중에 한 남자 청년이 필기를 무척 열심히 하거나, 또는 낙서를 심하게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필기라 여기기엔 어쩐지 청년의 이미지에 자유분방함이 넘쳤고, 낙서라 여기기엔 진지했다. 물론 잠깐 스친 느낌이었다. 강의 마치고 개인적인 질문도 받고 인사를 나누는데 그 청년이 그렸다며 내민 내 얼굴이다. 강의 들으며 필기 또는 낙서로 열심히 강사를 그려준 것이다. 가끔 이런 선물을 받은 적이 있지만 유난히 좋은 건 '청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청년은 어쩐지 그냥 편이 되어주고 싶고, 청년이 뭘 하면 그저 좋아 보인다. 특히나 어느 청년이 자발적으로 한 무엇이라면, 좋고 좋고 또 좋은데. 자발적인 작품이라니.



그렇게 바쁜 인기 강사는 아닌데 해마다 이때는 주가상승이다. 8월 15일을 낀 앞뒤 2박3일을 전국의 거의 모든 교회 청년부의 수련회 기간이다. 벌써 강의 약속이 되었는데 몇 차례 섭외 전화가 온다. 일정상 가능하더라도 하루에 두 번 강의를 하진 않기 때문에 맨 처음 인연이 닿은 바로 그 교회 청년부를 만난다. 15, 16, 17 수련회 기간 중 하나 씩, 세 번의 강의를 마친 저녁이다. 전과 달리 세 교회 중 대형교회가 하나도 없고, 어쩐지 느낌이 비슷한 교회들이었다. 두 교회는 이미 강의를 한 번 다녀왔고, 두 번째 만나는 만남이기도 해서 내 교회 청년부를 만난 느낌으로 정겨웠다. 



그래서 삼일 내내 좋았다. 기간 중에는 사랑하는 권사님을 천국에 보내드렸고, 사이사이 위로예배 발인예배를 드렸다. 슬픔과 그리움으로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고 몸은 그 어느 때보다 피곤했지만 강의하고 이들을 만나는 순간 만큼은 생명력과 기쁨이 넘쳤다. 그야말로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을 오가는 사나흘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발인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권사님을 보내드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수련회장으로 가 10시부터 3시까지 강의였는데. 운전하고 가는 동안에는 강의를 포기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오후 3시까지 내 몸과 마음이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정각 10시,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하고,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해 던지지는 농담 한 마디에 환호성을 지르며 물개박수를 쳐대는 그들의 에너지가 나를 이끌었다. 3시까지 너끈했다.


결혼 첫 해. 결혼해서 너무 좋은데. 남편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좋은데 그 해 여름 수련회 시즌이 되자 우리 둘 모두에게 병이 생겼다. 수련회 앓이였다. 청년으로 살던 10여 년, 여름마다 수련회에 올인했고, 거기서 얻은 영적 심리적 에너지는 말할 수가 없었던 것. 수련회 금단현상으로 마음을 잡지 못고 뒹굴거리다 에라, 교회 청년부 수련회에 아이스크림이나 사다주자! 하고 일어나 양평의 수련회장으로 갔었다. 그때 사진이 있다. 채윤이 임신하고 긴 입덧으로 몸이 많이 허약해졌었는데 마냥 좋았다. 돌아오는 길, 휴일 저녁 교통체증이 최악이었던 기억.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청년부 수련회에 대한 아련한 마음. 생각난다. 생각난다.


스스로 사유하고, 책 읽는 청년들을 특별히 애정하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청년들의 자발성과 창조성이다. 대단한 자발성이나 창조성이 아니다. 수련회 프로그램을 스로 만들고,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더 의미있게 진행할까 애쓰고 참여하는 태도. 그것은 긍정성이다. 자발성과 창의성을 한데 모으는 일이고, 그런 수련회는 거의 대박 재밌고 은혜롭다. 삼일 연속 갔던 청년부의 수련회는 그런 에너지가 넘쳤다. 최근에 별로 접하지 못한 에너지라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울 만큼 좋았다. 두 번은 특히 안면을 튼 청년들이라 내 개그코드도 알고, 스타일로 감지했기에 더 잘 소통할 수 있었다. 오늘 강의는 아예 대형을 바꿔 다같이 원으로 마주고 앉자고 제안을 했다. 감상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마주앉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강의하다 카메라 드는 일이 없는데 청년들끼리 얘기하는 시간을 주고, 또 주제활동을 하면서 자꾸 찍게 되었다. 사진을 찍었고 특히 동영상을 찍었다. 와글와글, 와글와글, 그러다 갑자기 와하하하하, 박수소리와 함께 터지는 웃음이 참 듣기 좋았다. 이들이 나눈 이야기, 만든어 낸 이야기며 그림이 참으로 기발하니 발표를 시켜놓곤 와하하하, 내가 웃고 박수를 친다. 청년사역이 어려운 시대라고 한다. 청년부 목회자나 선교단체 간사들을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나도 동의한다. 헌데 지난 며칠의 경험으로는 청년가 살아 움직이며 부흥할 것 같은 느낌이다. 코스타나 성서한국에서 만나는 청년들도 참 좋은데. 대단한 시대적 의식이 없어도 그저 청년의 에너지를 잃지 않고 함께 모여 있는 지역교회의 청년부의 좋음을 따르지 못한다.


공동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남편과 나를 하나 되게하는 가장 큰 열망 중 하나는 공동체이다. 둘 사이 정직하고 자발적 공동체 되고자 20년 노력해왔고, 그 열매가 깊고 풍성함을 고요히 강렬하게 느끼고 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대한 갈망 또한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우리를 이어준 본 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이 결국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이러니 하게도 지난 며칠, 사랑하는 권사님을 천국으로 보내드리며 그 이별을 통해 공동체를 느낀다. 너무도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공동체를 느낀다. '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 갈 때' 라는 찬양 가사가 적절할 것 같다. 그런 때, 다 사그러졌을 때 '죽음'을 통해서 사그러진 사랑이 되살아나다니! 



채윤이가 굳이 권사님의 장례예배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이른 아침 드리는 발인예배까지 가면서 차에서 나눈 이야기가 있다. "엄마, 권사님께 너무 죄송한 게 있어. 권사님이 나한테 써주신 편지에 멋진 실용음악가가 되어라, 고 해주셨는데. 권사님이 내가 하는 음악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그래서 권사님 아프실 때 찬송가 한 곡 편곡해서 녹음해서 보내드리려 했거든. 실은 녹음도 해놨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하려고 못 보내드렸어. 너무나 아쉬워. 엄마, 권사님과 내가 나이로나 개인적으로 크게 관계가 있는 것 아닌데도. 내가 마음이 이런 것, 이게 공동체인인가봐." 교회에서 누구보다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있는, 자발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청년 공동체를 선망하는 채윤이가 그렇게 말했다. 실은 생기 넘치는 수련회에 가면 청년이 된 채윤이 생각이 많이 난다. 채윤이 대신 내가 부럽다. 


자발적이며 창조적인 사람들, 청년들의 모임. 두어 시간 안에 작품이 하나 뚝딱 나오고, 한 15분 만에 기발한 이야기 하나를 뚝딱 만들어지는, 하하호호 깔깔깔깔. 살아 생기가 느껴지는 공동체, 다시 꿈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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