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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정

판타지아 일상

larinari 2017. 1. 4. 19:22



어렸을 적부터 책을 좋아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아버지가 만화책은 허락하질 않았다.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만화는 <소년중앙> <새소년> 같은 것이었다.

교사였던 오빠가 방학마다 집에 오며 서점엘 데리고가 책을 사줬는데

<동물농장> <솔로몬의 동굴> <소공녀> 같은 책에 얹어 나름 교양 만화라고 얻은 것이다.

아, 교회에서 정기구독하던 <새벗> <교사의 벗> 같은 교회용 잡지에 있는 만화도 있다.

그리하여 나는 만화책 수십 권 쌓아 놓고 아랫목에서 뒹구는 낭만을 모른다.

그 결핍은 나의 독서 놀이에 치명적인 악습을, 그 습관은 상상력 결여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시간 죽이기' 식의 독서를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소설, 특히 여러 권으로 된 소설 읽는 일이 드물다.

드물게 장편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면 무언가 도피할 현실에 맞닥뜨린 때이다.

남편과 사귀다 헤어졌을 때 방에 틀어박혀 읽었던 임철우의 <봄날> 다섯 권을 잊을 수 없다.

나보다 더 큰 고통, 더 긴 이야기에 빠져 현재의 고통을 회피하고자 함이었다.

실연으로 죽을 것 같지만 <봄날>의 현실로 들어가는 순간 내 고통은 고통 축에도 들지 못했으니.

채윤이를 품고 입덧이 심해서 숨쉬기도 어려웠던 시절의 진통제는 김산의 <아리랑>이었다.


작년 12월부터 판타지 소설 <어스시 전집>을 읽고 있다.

어느 날 남편이 뜬금없는 링크를 보내면서 추천을 했었고,

읽던 책 한두 권에서 인용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사실 나는 두 애들이 <해리포터> 시리즈를 반복해서 읽을 때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읽을 책이 수두룩한데 판타지 소설 전집 읽을 시간이 어딨냐.

헌데 이 어스시 전집은 왠지 끌렸다. 호기롭게 전집으로 딱 구매 해놓고 읽기 시작했다.

물론 독서 중독자라서 한 권만 읽지는 못한다.

이 책 읽다 보면 저 책이 신경 쓰이고, 저 책 붙들고 있자니 그 책이 궁금해지고.


성탄절 즈음에 남편이 입원하여 금식 치료를 하였다.

마음으론 안됐지만, 일부러 음식 사진 보여주며 놀리곤 했는데..... 바로 죄 받았다.

엊그제 우리 가족 중요한 행사 'Big Family Day'로 정한 날이었다.

지난 1년을 돌아보고 새해 기도제목을 나누며 기도하는 시간.

물론 맛있는 식사에, 맛있는 케이크 먹는 순서가 먼저이다.

맛있는 해물탕을 먹고, 맛있는 케이크 집에 가 앉았다가 친한 친구 아버님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순간 마음이 쿵하고, 충격이 됐는데 그 탓인지 어쩐지 얼마 후부터 장이 꼬이기 시작.

최악의 화장실 게이트에 휘말려서 피를 보는 사태까지.

결국, 병원에 가서 금식 처방과 함께 링거를 맞았다.

낭군님 지신 십자가, 와잎은 안 질까. ㅠㅠ 놀렸던 그대로 벌 받고 말았다.

기침 감기 기본으로 깔고 복통을 앓는 통에 기침하면 배가 더 아픈 것까지 똑같이.


허리 아프도록 침대에 누워 조금 정신이 차려지면 어스시 전집을 읽는다.

웬만하면 빠져들어 한 시간 쯤은 금방 죽여버릴 만도 한데,

제길, 체력이 딸리니 눈이 잘 안 보인다. (노안 때문은 아닐 거야. 누워 읽는 자세 문제일 거야)

그 어느 때보다 판타지 소설에 빠져들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리 머리를 쓰고 걱정을 해봐도 각이 안 나오는 일상으로부터 도피하고픈 마음.

각이 안 나오는 현실에, 나의 일상에는 지금 환각제가 필요하다. 판타지가 필요하다. 


하하, 그런데 리처드 로어 님은 <불멸의 다이아몬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은유만이 신비에 관해 정직하기 때문에, 은유는 종교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다.'

'상징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핵심적 의미를 다시 새로운 틀 속에 넣고 재구성하고 재조정하게 만든다'

라고도 하셨다.


아, 실은 만화 결핍증으로 인해 판타지 소설 울렁증 있는 내가 기꺼이 어스시를 선택한 이유였다.

단지 막막한 현실에의 도피가 아니라 뭔가 길을 잃은 것만 같은 나의 이야기를 재구성 하고 싶어서.

판타지에 담긴 '은유(meta-phore)'들은 우리를 저 너머로 인도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고 보면, 진통제 삼아 책을 먹었던 것은 단지 진통제만은 아니었던 듯.

나의 일상보다 더 큰 이야기를 책 속에서 만나며

나의 지질한 아픔과 걱정이 큰 세상, 더 광활한 이야기와 연결되고,

한 챕터가 종결될 때마다 좁은 나의 경계는 허물어지곤 했던 것이다.

물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면 또 다른 경계가 떡 허니 앞을 막고 서 있을 테지만.



* 예, 이제 몸은 괜찮습니다.

세트로 아파가며 이래저래 가오도 안 서고,

되는 일 없는 부부이지만 그럭저럭 잘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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