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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글 모음/JP&SS의 사랑과 책

하나가 되는 수고로움

larinari 2007.06.30 10:23


우리는 신혼 초에 서로를 아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리 만큼 집착했다. 결혼해서 살다보면 자연스레 알아가는 것이지, 유난스럽게 군다는 직접적인 핀잔과 간접적인 눈총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확신한다. 배우자에 대해서 더 잘 알수록 행복한 결혼으로 한 걸음씩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더 잘 아는 것은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길이라고.
암튼 서로를 더 잘 알기 위한 시간과 여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혼수를 준비할 때 TV를 사지 않았고, 최소한 1년간은 아기를 가지지 않기로 하는 등의 물리적인 노력을 하였다. 이런 원칙과 더불어 Karl Jung의 심리학과 그것을 기초로 만들어진 성격유형검사 MBTI 와의 만남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참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성격유형검사에 의하면 JP와 SS는 정반대의 유형이다. 비슷한 점이 많은 줄 알고 연애하고 결혼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랐고, 그나마 같은 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동의, 건강한 가정에 대한 꿈 등 그야말로 몇 가지의 근본적인 원칙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다른 점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이해하려고 애쓰고 이해시키려 애쓰는 과정은 둘이 하나 되는 과정에 가속도를 붙게 해주었다.
이러한 내용을 힘주어 말하고 싶은데, JP는 명시적인 분명한 설명을, SS는 개개의 일화와 갈등해결 과정을 재밌게 나열하는 것으로 독자들이 알아가도록 하는 글쓰기를 원했다. 이와 더불어 두 사람의 매우 다른 일처리 방식으로 인해서 이번 글은 마감이 다 되도록 시작도 못 하고 싸우고 삐지고 말 안하는 둥 하다가, 최후의 순간에서야 겨우 합의를 이뤄 부랴부랴 써야할 상황이 되었다. 글이 퓨전 스타일의 형태를 띠게 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부부의 서로 다른 성격과 의사소통 방식이 부딪히고 합의하는 과정은 이번 글의 주제에 딱 들어맞는다. 비록 서로서로의 생각과 문체와 내용이 조화롭게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삶과 글이 헛돌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다는 데에 위안을 삼는다. 그럼 SS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외향적인 SS와 내향적인 JP

SS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시댁에서 처음으로 식사를 하던 자리였다. 아직은 피차에 익숙하지 않은 관계들이니 만큼 긴장된 상태에서 식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 조용히 식사하던 남편이 그야말로 조용히 쌍코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기가 시기인지라 나는 너무도 민망하고 우습기도 하고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신혼여행 가서 뭘 그렇게 무리를 하셨다고 쌍코피가 터져~ 이걸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시부모님 앞에서 이게 뭔 일이람?’ 터져 나오는 웃음을 틀어막고 있는데 더 당혹스러운 건 시부모님의 반응이었다. 아버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시고, 어머님 역시 뭐 그리 다르시지 않은 표정으로 ‘코피 난다. 휴지 갖다 닦어라’ 하시며 이내 조용히 식사 진행. 그리고 그 날 오후, 시어머님은 조용히 혼자 나가셔서 남편의 보약을 지어 오셨다.
같은 상황이 우리 친정집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이미 식사 시간이 그리 조용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신혼여행 갔다 온 신랑이 밥 먹다가 쌍코피가 터졌다! 이건 밥상이 뒤집어질 일이다. ‘신혼여행 가서 뭔 일 있었냐? 살살 하지 그랬냐? 보약 좀 먹어야겠다...’ 등등 온갖 놀림과 낄낄거림으로 난리가 났을 일이다.
내향형의 남편과 주로 내향형인 시댁 식구들, 그리고 언제나 시끌벅적한 외향형의 우리 가족과 그 사이에서 자라온 나. 나로서는 시댁의 그 조용함과 정적이 쉽게 적응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우리 시댁은 가족관계가 영 서로들 안 좋은가보다. 우리 집 만큼 화목하지가 않다’ 하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씩 남편과 함께 결혼식 축가를 불러달라는 부탁을 받는데 그 때 마다 우린 갈등이었다. 내게는 그런 일이 그냥 하면 되는 일이다. 오히려 즐거운 일이다. 헌데 남편은 그 때마다 ‘안 하면 안 되나?’ ‘내가 기타 쳐 주고 당신 혼자만 부르면 안 되나?’ 하면서 함께 있는 사람까지 자신을 잃을 정도로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예전에 안 해 본 일도 아닌데, 뭐 이렇게 할 때 마다 이러나?’ 이 일로 인해서 피차에 쌓아둔 스트레스로 인해서 결혼식 축가 한 번 부르고 12시가 넘도록 싸운 적이 있다.

정기적으론 아니지만 가끔씩 혼자 있는 시간을 위해 훌쩍 떠나야 하는 JP, 말을 고르고 골라서 하는 사람처럼 한 번 말을 하려면 ‘어......그.......’ 하면서 발동을 걸어야 하는 JP(그래서 내가 준 별명이 ‘7초’이다. 말이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내가 열 마디를 쏟아내면 한 마디 정도 말하는 JP.
이 모든 것이 남편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첫 단계에서 풀어야 할 숙제였다. 알고 보니 남편과 나는 에너지의 흐름이 다른 거였다. 나는 에너지가 밖으로 흐르고 분출되고 하는 반면 남편은 에너지가 자신의 내면으로 흐르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사람들 만나고 대화하면서 에너지가 얻어지는 반면 남편은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때 더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그렇게 따로 떼어 자신 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 주는 것이 필요했다. 어휴~ 말이 쉽지. 같은 집에 살면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남편에게 말.안.걸.기. 가 내게는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SS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던 바이지만 결혼하고 나서 본 이 남자는 여기 아닌, 저기 그 나라에 사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내 보기에 현실감각이 부족했다. 구체적으로는 경제개념이다. 대체 은행업무나 카드 사용에 대해서 완전히 까막눈. 신혼 초 두 세 개 정도의 은행 일을 한 번에 남편 혼.자. 처리하러 간 적이 있었다. 내 기억으론 아주 단순한 두세 가지 일이었다. 은행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왔다고 자랑스럽게 돌아왔는데 내 참! 기가 막혀서... 정작 가장 중요했던 25만원 입금하는 일을 빼먹었을 뿐 아니라 돈을 잃어버리고 온 것이다. 그 단순한 은행업무가 얼마나 버거운 일이었으면 창구까지 분명히 가져간 돈을 언제인지도 모르게 잃어버리나? 이 뿐인가? 카드사용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설명했건만 카드로 돈을 찾는 것과 현금서비스 받는 것도 잘 구분이 안되며 카드 얘기만 나오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기기 일쑤다.
이런 점들이 생활이란 걸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설명해도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것일까? ‘난 이거 완전히 결혼 잘못한 거 같애. 책밖에 모르는 양반의 후손을 만나서 삯바느질 하면서 가정을 꾸려가게 생겼어!’
문제는 그거였다. 나는 모든 정보를 시각, 청각...등의 감각을 동원해서 사실을 받아들이는 반면 남편은 사실에 대한 의미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일에는 아주 단순한 일이라도 쉽게 자신의 정보로 소화하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답이 간단하다. 남편에게 꼭 이해했으면 하는 것에 대해서는 차분히 ‘의미’를 설명하면 되는 것이었다. 일단 의미부여만 되면 아무리 복잡한 내용이라도 독학으로 알아내는 것이었으니.
가정의 영적 가장이 꼭 남편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신앙 좋은 아내들이 스트레스 받는 것을 보았다. 신앙 없는 남편이 가정의 영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가정예배를 인도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게 되지 않아서 닦달하게 되고 갈등이 커 지게 되고.... 우린 가정의 영적인 가장은 두 사람이 함께 하기, 또는 어떤 부분에서는 더 재능 있는 것에 리더쉽을 발휘하기에 합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집의 영적인 가장은 남편이 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남편은 나무(구체적 사실) 보다는 숲(의미, 비전)을 보는데 탁월하니, 남편이 비전을 제시하면 내가 이런 저런 아이디어로 그 비전을 현실화시키는 참모역할을 하면 되니까 말이다.

다음은 똘똘이 스머프 JP의 말씀이다. 늘 이런 식이다. 내가 열심히 재밌는 일화들 짜내고, 내 자신 망가지면서 분위기 띄워 놓으면 도덕선생님처럼 저렇게 장황하고 진지~이 하게 설명하시며 주변을 썰렁하게 해 놓는다. 때로 남편과 대화 하다보면 난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 선생님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하나씩 질문하면서 나만 말하게 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결론을 찾게 하려는 산파법이라는 거 말이다. 거기에 넘어갈 나인가? 의도를 간파하고 딴 짓에 열중해도 선생님의 설명은 끝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여러분도 맛을 좀 봐야 할 것이다. 혹 불면증 있으신 분들은 JP가 쓴 다음 부분은 아껴뒀다 잠자리에서 읽으셔도 좋을 듯. (아니 혹 어떤 독자들께서는 오히려 JP의 글이 진짜 알맹이 있는 글이라 말씀하시며 SS의 글은 가볍고 말장난뿐이라 하실지 모르겠다)

둘이 하나 되어

JP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루 종일, 일년내내, 한평생을 함께 살 것을 서약한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거룩하고 가장 진실하고 가장 장엄하게,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서약문을 낭독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진실과 존귀함으로 서로 사랑하겠습니다.” 결혼식이 거행되기 전까지 ‘결혼식’ 준비는 힘들었지만 이제 곧 펼쳐질 환상같은 ‘결혼’을 꿈꾸며 신랑 신부는 사랑의 띠를 곱게 수놓고 굵게 땋아간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순간, 주례자의 입은 마치 하나님의 음성인 듯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선 두 사람의 하나됨을 선포한다. “이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습니다!” 쿵!! 쿵!!!(신랑의 심장이 놀래 뛰는 소리) ‘아니 이게 뭔 말이여?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죽을 때까지 이 여자와 떨어질 수 없다고???’ 갑자기 하늘에서 엄청나게 무거운 족쇄가 쑤욱 떨어지더니만 내 몸을 콱 조여오는 듯 갑갑한 느낌이 든다. ‘아휴~ 조금만 더 늦게 할 걸, 내가 왜 이리 결혼을 서둘렀던고...’
그 때의 그 느낌은 사실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아직 그 느낌의 실체를 완벽하게 복원해 내지는 못했지만, 이제와 추측해 보건대 ‘나의 자아’가 ‘다른 자아’와 만나 새로운 ‘공동의 자아’를 만들어 낼 것을 요구하는 결혼의 특성 때문이리라. 내 행동 양식은 공동의 양식으로 바뀌어야 하고, 내 자아인식과 세계관도 두 사람이 공유하는 자아인식과 세계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녀는 내 안에 들어오고, 나 역시 그녀 안으로 스며들어 간다. 그 과정이 원활하게 되기 위해 내 습관과 행동,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인식, 나만의 삶의 스타일, 어쩌면 내 전부를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과거의 나를 고집스럽게 유지하길 원한다면 나는 결코 결혼을 행복하게 영위하지 못할 것이다. 즉, 결혼은 새로운 사람으로의 거듭남을 요구하는 셈인데, 만약 그걸 거부한다면 결혼은 그 궁극적 목적인 ‘영혼의 하나됨’으로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하나됨’도 어림없다. 최악의 경우는 ‘육체의 하나됨’도 쉽지 않으리라! 확연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이런 원리를 결혼의 제도 속에 제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과 직면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성혼 선포의 엄중한 요구를 들으며 나를 개방할 것이냐 아니면 나를 고수할 것이냐를 놓고 짧은 순간이나마 괴로워했던 것이다. 즉, 새로운 자아를 거부하면서 과거의 나를 고집스럽게 유지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나를 개방하여 아내와 함께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인가! 의 문제이니, 아! 결혼의 요구 앞에 나를 살리느냐 죽이느냐, 이것이 문제로구나!

내가 보.기.에. 아내는 오버를 잘 한다. 아마 자신의 경험을 생생하게 느낌이 팍팍 가도록 표현하고 싶은 (선천적?) 의도에서 자신의 대화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는 게 아닌가 싶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아채고 점차 반복적으로 그것과 부딪히자, 불경스럽게도 나는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정직하지 못하구나. 사실을 사실대로 전달하거나 표현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서 과장되게 포장해서 전달하는구나! 오! 이를 어쩔꼬!’ 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이 사람에 대한 것으로 나타날 때, 나는 서서히 참아내지 못했다. 예를 들면 이런 표현들이다. “당신은 내가 말하면 한.번.도. 제대로 들어주는 적이 없어.”(한번도?)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할 때 너.무.너.무. 싫어”(지난번엔 좋다고 해 놓고.) “나는 절.대. 아니야. 진.짜.야.” “당신이나 맨.날.맨.날. 그렇게나 하지 마셔~.”(맨날맨날이라니!) “나는 당신이 이렇게 해 주면 너~무 좋아!”(절대 아니면 너무?) 아내의 이런 패턴들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고 내 대화의 패턴들과 서서히 대립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내가 그렇게 말하게 된 배경이나 나의 원인제공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더 자주 아내의 발언과 의도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은 했지만 방향은 잘못 잡곤 했다. 대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둘 중 하나다. ‘그냥 참아 버려?, 아니면 지적해 줄까?’ 그렇지만 내가 아내의 문제들을 조목조목 얘기하면 아내는 자동적으로 거부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내 문제로 돌려버린다. 그러면 아니한만 못하게 상황만 더 나빠진다. 반대로 아내의 문제를 침묵으로 일관하면 또 그건 그것대로 무시한다고 불평한다. 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아내는 이래도 화 낼 것이고 저래도 화 낼 것이니.
부부 사이에 차이로 인해 갈등이 생길 때, 혹은 보는 관점이 다르거나 대화 스타일이 달라서 갈등이 생길 때 자기에게도 일정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 말이야 참 쉽지 않은가? 그렇지만 실제 결혼 현실에서는 왜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이제야 우리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한다. 난해한 시를 해석해 낸 것처럼 복잡한 아내의 태도들이 읽혀지기 시작한다. 청소를 몰아서 하는 이유, 하루에 수도 없이 전화하는 이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이유, 앞에서 거절 못하고 뒤에서 열받아 하는 이유 등등. 드디어 아내의 행간이 읽혀지기 시작한다. 반대로 잠이 많은 나,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나, 칭찬을 잘 못하는 나, 백화점을 싫어하는 나 등등 내 숨은 의도를 아내는 귀신처럼 알아 맞춘다. 더 이상 위장해 봐야 서로에겐 우습기만 할 뿐 우리의 속마음에는 어느새 서로의 분신들이 들어와 앉아 있다. 그러다 보니 때때로 내 모습을 통해 아내가 느껴지고 아내의 말 속에서 나를 느끼게 된다.

어느 때부터인가 결혼식장에서 채워진 족쇄가 풀린 것 같이 결혼이 가볍고 자유스러워졌다. 그렇지만 아내와 나의 거리는 그때보다 더욱 가까워졌다. “나는 결혼한 것이 너무너무 좋다. 아내는 한 번도 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려고 한 적이 없다. 내가 지금 하는 말, 진짜로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아내와 살다보니 나도 오버하는 맛을 진짜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 신비가 맨날 맨날 계속 되도록 나는 정~말로 노력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지고한 명령을 건강하게 통합한 사람의 진정성은 ‘결혼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사랑을 외치는 자가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면 울리는 꽹과리 소리가 되기 쉽고, 이웃 사랑에 몸 바치는 자가 자기 남편을 존중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어딘가 공허한 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리라. 왜냐하면 한 개인의 첫 번째 타인(이웃)이 곧 배우자이기에 그렇고, 그리고 그 타인은 결혼으로 인해 바로 자기 자신과 질적으로 동등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배우자와의 사랑과 일치는 공동체의 기초를 이룬다. 각자의 고유하고 독특한 인격이 상호 존중받고 사랑스럽게 수용될 때 공동체는 시작되고, 진짜 교회가 형성되며, 제대로 된 자녀양육도 가능해 진다.


SS 주일날 예배와 모든 순서가 조금 일찍 끝났다고 생각되는 때, 나는 갑자기 주어진 시간에 ‘흑석동(친정) 갈까?’하고 공짜로 생긴 시간을 쪼개서 한 껀 해 보려고 제안을 한다. 그럴 때 남편의 반응 ‘그래?, 그러고 싶어?’ 이러는데, 이건 ‘싫다’ 이런 뜻이다. 난 그래서 남편이 처갓집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어떤 땐 남편 시간이 여유 있겠다 싶어서 전화를 해서 간단한 일을 부탁할라 치면 짜증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것 역시 남편이 날 돕기 싫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친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헌데 남편은 계획된 시간 사용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가급적 계획된 대로 일이 진행되어야 편안해 하고 갑자기 돌발적으로 생기는 일에 대해서는 힘겨워 한다. 반면 나는 계획이 달라지는 것을 오히려 즐기고 늘 비슷하게 예측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불편하다. 학교 다닐 때 모든 레포트를 거의 제출 전 날에 밤새우는 것으로 해결했고, 시간을 다투는 마지막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일을 처리하며 짜릿함을 느낀다. 우와~ 남편의 레포트 쓰는 방식을 보면서 나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2주 전부터 자료를 모으고 일주일 전부터는 말도 현격하게 없어지면서, 수염이 덥수룩해지고 거의 도사님 수준으로 몰입을 한다. 그리고 하루 전, 나 같으면 숙제를 시작할 시간쯤에 이미 레포트는 완성이 되어 프린트 되고 있다. 말이 그렇지 그 2주간 거의 가정을 포기하고 자신의 일로 빠져 들어가는데 이런 일은 반복해서 당해도 잘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즉,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일하는 방식이 - 내가 일을 몰아서 할 때 느끼는 자연스러움처럼 - 남편에게는 편안한 방식이란 걸 머리로 안다 해도 마음으로 공감하기는 힘든 일이다. 그건 나를 보는 남편의 입장에서도 다르지 않은 어려움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 뿐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는 서로의 성품 때문에 참아내야 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들이 무수하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주 실패하기도 한다. 이 남은 숙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가는 과정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최소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으로 인해 갈등이 생길 때마다 또다시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때, 결국 이 글을 포기하지 않고 쓰게 된 것처럼, 보다 풍성한 결혼의 열매를 누리리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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