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떠난 지 한 달이다.

 

그리고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사순절이 시작되던 월요일이 내 생일이었다. 사순시기를 특별한 기도의 시간으로 보내려 했었다.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코로나로 인한 우리의 아픔을 품어야지 싶었다. 아이들에 생일 선물로 화분을 사주기로 해서 화원에 갔었다. 커다란 해피트리 화분을 봤는데 어쩐지 우리 엄마 같았다. 엄마가 공들여 키우던 벤쟈민 화분이 있었다. 좀 시들라치면 잎을 닦아주고 매만지며 엄마가 기도를 했다. 그럼 또 어느새 싱싱해졌고, 키가 천정 가까이 자랐다. 자칭 타칭 죽어가는 화분도 기도로 살려내는 여인이 되었다. 바로 그 벤자면 화분과 닮을 커다란 해피트리였다. 마음으로 생각했다. 사순시기를 기도로 보내야지, 부활주일 즈음이면 코로나도 끝나고 병원의 엄마와 마음껏 면회할 수 있을 거야, 두 달이라고 했으니 부활주일 지나면 골절된 손목이 꽤 붙었을 거야, 부활주일과 함께 아픔이 끝날 거야, 그때 와서 저 화분을 사야지, 이 사순시기를 잘 보내고 엄마 닮은 저 해피트리 사러 올 거야! 

 

시간이 이런 거구나, 한 달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달라지고 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앞산의 연둣빛의 생명을 느낀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덜 힘들다. 부활주일 영상예배를 드렸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네' 첫 찬송을 부르는데 마음이 갑자기 냉랭해진다. 성경을 읽고, 설교가 시작됐는데 부활, 부활, 부활...... 이 단어를 들을수록 설교가 마음에서 멀어진다. 더욱 차거워지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 웬만하면 남편의 설교에 마음이 움직이고 은혜를 받는다. 헌데 진행될수록 귀를 막고 싶은 심정. 냉소, 차가웠던 마음이 어느 순간 분노로 끓기 시작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다. 옆에 아이들이 앉아 있어서 내색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겨우 설교를 견디고, 기도시간 다시 눈을 감고 화를 다스리고 다시 찬송을 부른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참 좋아하는 복음성가다. '살아계신 주'. 그런데 누가 이렇게 가사를 이상하게 바꿔놓은 거야. 찬송가로 들어오면서 가사가 많이 바뀌었다. 화가 치민다.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가슴속에 넘치는 확신 우리의 가는 길에 소망 넘치네' 이 가사를 지날 때 분노가 극에 달했다. 눈물이 났다.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예배를 마치고 점심 준비하는데 남편이 곁에 와 표정을 살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화가 나." "왜 화가 나?" "그러게, 부활주일이라 화가 나."라는 말이 나왔다. 부활주일이었고, 부활에 대한 찬송을 부르고, 설교 주제가 부활이어서 화가 났다. 부활을 믿으라고, 소망을 가지라고 강요받는 것 같았다. 그 외 더 긴 설명은 어렵다. 장례식 며칠 후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천국이 믿어지지 않아."라고 말했을 때처럼 황당한 상황이다. 부활주일이라 화가 난다니, 가족들은 그때처럼 황당할 것이다. 나는 이런 내 마음이 괜찮다. 갑작스런 감정 변화가 다소 당혹스럽긴 하지만 허용할 수 있다. "그러면 못 써!" 하는 목소리는 전처럼 크지 않다. 느낌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맘에 들어하시는 느낌이 따로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 '느낌에는 윤리성이 없다'라고 내 입으로 수백 번 했던 말을 내게 들려줘야 할 시간이고, 조용히 허용해주고 있다. 부활의 예수님도 그렇게 들어주실 줄 알고 있다. "그렇구나, 나의 부활이 멀게만 느껴지는구나. 엄마가 그립지? 얼마나 그리운지, 얼마나 슬픈지 알겠구나. 화내도 괜찮아. 진실로 부활을 믿고 싶고, 피부로 닿는 위로를 얻고 싶은 마음의 표현인 걸 내가 왜 모르겠니? 괜찮다. 네가 편하게 화를 내주니 오히려 나를 믿어주는 것 같아서 좋구나. 얼마든지 더 화내고 울어도 된다. 내가 다 들어줄게."

 

상실과 애도는 짝이다. 상실을 벗어나(온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는 것은 애도를 통해서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젠 정설이 되었다. 충분히 슬퍼해야 떠나보낼 수 있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이 시대 죽음 분야의 최고 전문가라 불리는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일찍이 상실을 수용하는 다섯 단계를 정리했다. '부정(그럴 리 없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 분노(왜 나야, 불공평해, 이럴 수는 없어!) - 타협(하나님, 한 번만 살려주면 이제 정말 제대로 살게요!) - 우울 - 수용'이다. 꼭 이 순서를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애도를 위한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 다양한 감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뇌졸중으로 9년 간 마비된 몸으로 살아가던 퀴블러 로스가 죽기 한 달 전에 작업을 마친 마지막 책 『상실 수업』은 더는 이론이 아닌 자기 경험의 고백처럼 들린다. 엄마 없는 빈 자리를 마주하는 낯선 시간을 통과하며 읽으니 더욱 그러하다. 마치 내게 들려주려고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책이 다가왔다. 슬픔, 공포, 아픔이나 외로움보다 분노가 먼저 다가오면 더 강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분노가 슬픔에 앞설 수 있다. 나 역시 '분노를 위한 시간, 슬픔을 위한 시간'이란 제목으로 교회 문제로 상실감으로 고통받는 분들을 만나기도 했다. 애도의 시간, 충분히 슬퍼하라고 하는 말은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충분히 분노하라! 분노가 논리적이거나 타당할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퀴블러 로스의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분노는 곧 저항의 힘이다. 다시 말해 상실의 공허감 속에 잠시나마 붙잡을 수 있는 하나의 닻이 될 수 있다. 처음에 슬픔은 마치 바다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진다.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내 누군가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 누군가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주변에 없는 사람일 수도, 사랑한 이가 죽은 후 태도가 달라져버린 사람일 수도 있다. 갑자기 큰 구조물이 올라온다. 그들을 향한 분노가 바로 그것이다. 분노는 드넓은 바다 위로 당신과 그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다리가 된다. 그것은 지지대와 같은 것이 된다. 분노의 힘으로 만들어진 그 연결선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우리는 분노를 느끼는 법보다 억제하는 법을 더 많이 알고 있다...... 화를 허락하면 할수록 마음속 깊이 감춰진 감정들을 더욱더 찾게 된다. 분노는 가장 즉각적인 반응이지만, 그것을 다스리면서 숨어 있던 또 다른 감정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보통은 상실을 고통을 발견하게 된다. 분노의 강도가 감당하기 버거울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잃어버린 사랑의 양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 반대편 출구로 나오게 될 것이다. 고통은 가라앉고, 상실의 감정들은 다시 형태를 바꾼다. 다른 이의 시선 때문에 분노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라. 누구든 당신의 분노를 비난하도록 두지 말라. 심지어 당신 자신이라 할지라도.

 

깔깔 웃다 갑자기 눈물이 날 때도 있고, 한 없이 내려앉던 마음에 불끈 힘이 들어갈 때도 있다. 부활주일 찬송 하나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기도 한다. 이렇듯 예측불가의 감정 상태에도 당황하지 않으려고 한다. 더욱이 나를 비난하지 않으려고 한다. 판단하지 않고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느끼려고 한다. (나 잠시 미친년이야, 엄마를 잃었는데 미치지 않는 년이 미친년이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칼끝이 내게로 향할 때는 죄책감에 끌려다니게 된다. 이 역시 '이렇게 느끼지 말자'라고 결심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충분히 느끼고 지나가게 둘 생각이다. 그러니 당신 옆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누군가가 있다면 그냥 느끼도록 두라. 감정이 오락가락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기 바란다. 다른 것을 느껴라 강요하지 말고, 그만하라고 재촉하지 말기를. 충분히 머무르다 반대편 출구로 나올 때가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그것을 바라는 사람은 고통에 빠진 당사자이다. 

 

찜해 뒀던 해피트리를 생각하면, 그때 그려두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생각하면, 이렇듯 멀기만 한 부활의 소망을 노래하다 보면 화가 나고 슬프다. 사순 시기를 기도로 근신하며 보내면 내가 바라던 그 부활을 보상으로 받을 거라 생각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아 자주 화가 났지만, 엄마 죽은지 한 달 만에 맞는 부활주일이라 특별히 화가 난다. 분노를 위한 시간이다. 분노에게 내어준 시간 뒤에는 무엇인가 또 다가오리라. 어떤 미친 감정이 됐든 피하지 않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겠다. 달리 도리가 없다. 

'세상에서가장긴장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무의 강, 떠오르는 것들  (0) 2020.04.17
연결  (2) 2020.04.16
분노를 위한 시간  (0) 2020.04.14
창피했던 엄마, 창피한 나  (0) 2020.04.11
마지막 말  (1) 2020.04.06
따뜻한 국물  (2) 2020.04.0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