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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정

한 잔 합니다

larinari 2014. 8. 30. 20:19


# 짠함 1

가끔 다른 엄마들로부터 그런 조언을 듣습니다. '애들을 너무 그렇게 강하게 키우지 말고 좀 해주고 차도 태워 데리고 다니고 그래요'우리 채윤이 한참 전부터 지하철녀로 유명하지요. 스스로 독립적인 면도 있지만 엄마가 너무 따까리를 안 해주는 탓도 있어요. 학교에서 하는 봉사활동 시간이 있는데 것도 혼자 다 알아보고 신청해 놓았습니다. 오늘 방화동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9시까지 가야 한다고. 길 검색을 해보니 대중교통으론 1 시간, 자동차로는 23분. 안 되겠다. 인천에서 강의가 있었는데 일찍 나가면 채윤이를 태워다 줬습니다. 채윤이 감동을 해가지고 '이 엄마아 웬일이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 끝나고도 엄마랑 같이 가면 안 돼?' 했는데 시간도 안 맞고, '갈 때는 지하철 타고 가' 했지요. 강의가 늦게 끝나기도 하고, 차에서 내려 혼자 가는 뒷모습이 짠하기도 해서 마치고 태우러 갔습니다. 점심시간 훨씬 지나서 배고프다며 기다리는 사이 김가네 김밥에 들어가서 우동 혼자 먹는 중딩. 강의한 곳에서 점심으로 준비된 도시락 두 개를 챙겨주셨는데 차에 타자마자 보더니 '어머, 맛있겠다' 하면서 뜯어서는 달리는 차 안에서 뚝딱 해치우는 여중생. 오늘은 이 모든 씩씩함이 조금 짠합니다.


# 짠함 2

낮에도 집에 혼자 있는 걸 그렇게 무서워 하더니 이번 방학부터는 확실히 달라진 현승이. 방학에도 누나는 연습 가는 날이 많았습니다. 엄마 역시 강의로 하루 종일 나가 있어야 하는 날에 혼자 척척 점심도 챙겨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집에 밥이 있어도 차려 먹는 건 싫다고. 혼자 밥을 차리면 엄마 없는 아이처럼 느껴져서 싫다고 꼭 김밥을 사다 먹습니다. 강의 마치고 전화했더니 쩝쩝거리며 받습니다. '엄마, 나 김밥을 다 풀지 않고 차에서 먹을 때처럼 길게 들고 먹으니까 안 흘리고 먹게 돼. 초한지 읽으면서 먹고 있어. 다 먹고 한강에 축구하러 갈 거야. 알았어. 알았어. 선블록 듬뿍 바를게' 애기처럼 보채지도 않고 언제 오냐고 묻지도 않는 씩씩함에 더 짠합니다. 저녁 먹고 영화보러 가는 누나 태워주고 영화 다 볼 때까지 카페에서 책 보고 온다고 나간 아빠. 엄마랑 둘이 있게 됐는데 원고 써야 하는 엄마 옆에서 '어휴, 어휴... 엄마, 아니야'하더니 '나는 참 오늘 가엾은 것 같애. 점심도 혼자 먹고. 지금은 또 아무도 놀아주는 사람 없이 이러고 있어야 해. 엄마 장은 다 봤어? 장이라도 보러 나갈까? 안 되겠지? 원고 써야지?' 제대로 가엾다. 너.


# 짠함 3

몸이 전같지 않아서 강의 마치면 진이 쪽 빠지고, 게다가 이번 주 내내 몸도 마음도 다운 다운 모드였습니다. 강의 마치고 채윤이 데리고 들어오니 주말 교역자 축구 마친 남편이 씻으러 집에 와 있습니다. 점심 안 먹었다고 짜파게티를 끓이고 있습니다. 순간 화가 불끈. '아니 운동하고 무슨 짜파게티야?' 다른 목사님을 식사하러 갔는데 속도 안 좋고 몸이 지쳐서 일단 집으로 왔답니다. 남편은 다시 나가고 채윤이는 한 시간 봉사활동을 더 채우기 위해 교회로 갔습니다. 나는 잠시 떡실신. 정신 차리고 일어나 원고 좀 쓰고 있는데 남편 전화. '여보, 채윤이 7시에 영화본다는데 저녁 일찍 먹어야겠네' 으아.... 저녁. 생각해보니 쌀도 떨어졌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가 쌀을 사고 장을 봐와 진땀 흘리며 저녁 준비. 남편 역시 몸과 마음의 컨디션이 나 못지 않게 저조한 줄 알기에 손도 까딱 안 하는고 있는데도 말 한 마디 못하겠습니다. 그저 속으로 얄미워 죽겠습니다. 저녁 먹다 영화시간 다 되어 동동거리는 채윤이 태워주겠다고, 아예 카페에서 기다렸다 태워오겠다고 나가는데 '어라, 설거지도 안 한다고? 매를 버네' 꽝꽝 설거지를 하고나니 분노가 피곤함을 이기고 갈수록 활활 타오릅니다. 그때 온 남편의 메시지. '저녁 하느라 힘들었지? 블라블라....' 솔직하게 오늘 상황을 읊어서 보냈더니 월요일 데이트 때  둘이 셀카로 찍었던 사진을  띡 보내왔습니다. 한 장 보내더니 또 한 장, 띠리릭, 띠리릭, 계속 보내 오는데 '우리 둘이 셀카를 이렇게 많이 찍었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진이 다 있습니다. 둘이 얼굴 딱 붙이고 찍은 사진들 이어서 보니 급 뭉클해집니다. 줄줄이 오던 사진 아래 마지막에 짧은 메시지가 띠리릭. '갑자기 눈물 난다' 나도 갑자기 울컥입니다. 이 남자 착해가지구 짠하게 하네.


# 짠함 4

짠하고 불쌍한 사람들 투성이입니다. 어찌 된 일이 불쌍한 사람들이 더 불쌍해지는 나날의 연속입니다. 마음이 잘 추스러지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짠하고 불쌍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뭘 이렇게 많이 지고 사는지. 누가 지워준 짐도 아닌데 스스로 싸들고 내려놓지 못하는 짐이 어디 한 둘이어야지요. 짠함 2, 현승이가 '엄마, 우리 카페 갈래? 거기 새로 생긴 카페 있잖아. 엄마 거기 가서 커피 마시면서 원고 쓰고, 나는 책 보고. 어때?' 가엾은 현승이 말 들어주자 하고 나왔는데 나오길 참 잘했네요. 시원하게 한 잔 하니까 화나고 무기력하면서도 복잡했던 마음에서 독기가 빠지고 '짠함'으로 정리되며 한결 나아지는군요. 마저 한 잔 쭉 들이키고 원고를 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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