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이다. 아니 7년 만이다. 매주 이렇게 모여 밥을 먹고 농담도 따먹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서너 시간 보내곤 했었다. 얼굴 본지가 4년, 이렇게 모인지는 7년이 지났는데 한참 농담을 따먹다 보니 바로 지난 주에 만났던 것 같았다. 처음 가정교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모임을 시작했을 때 다들 파릇한 신혼이었고 현승이는 기저귀를 차고 침을 질질 흘리던 아기였다. 긴 시간 함께 했다. 신티리이모, 신티리이모 했던 아이들이 몰라보게 컸고, 결정적으로 신티리 이모를 몰라봤다. ㅠㅠ 난 사실 며칠 전부터 마음이 설렜고, 한 가정 씩 들이닥치는데 마음 같아선 줄을 세워놓고 하나씩 찐하게 끌어안고 싶었다. 심지어 애들 아빠들까지 안을 뻔 했다. 언제나 그렇듯 일단 반가움은 바로 정신없음이 된다. 그래, 이 모임은 정신없는 맛이 있었어!

 

# 1

얘기 나누다보니 한참 이 모임을 할 때의 내가 지금 이 부부들의 상황이었다. 초딩과 유딩 사이. 큰 아이 초딩 또는 예비 초딩, 작은 아이는 애기. 생각해보면 힘든 시기이다. 이때의 나를 돌아보면 듁음이었다. 남편은 신대원 기숙사에 가 있고, 하루에 세 군에 음악치료를 하러 다녔다. 까막눈으로 초등학교에 간 채윤이 받아쓰기, 그림일기로 저녁은 전쟁이었다. 무엇보다 내 내면의 전쟁은 사춘기 이상으로 치열했었다. 그때 저장된 기억이 구슬이 하나씩 튀어 올랐다. 신앙 섬이 무너지면서 우정섬, 신뢰섬 등이 차례로 무너지던 시기. 홍상수 영화 제목처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거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거나 둘 중의 하나일 만큼 비정상적인 시기였다. 아니, 그렇게 내면의 전쟁이 치열했건만 어떻게 매주 이들을 만나서 웃고 울고 할 수 있었을까? 그 시기가 그 시긴가? 의문이 들었다. 그 시기가 그 시기이다. 내면의 성들이 그렇게 무너지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함께 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이들에 대한 어떤 책임감 같은 것들? 그런가봉가.

 

# 2

어떤 소모임의 리더가 되면 자주 마주하는 문제인 것 같다. 계속 들어줄 것인가, 어느 지적질을 할 것인가. 리더가 되면 답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고, 그 답을 줘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조금씩이라도 느낀다. (하긴 리더가 아니라도 우리는 모두 타인의 문제가 보인다고 생각하거나 착각하기 때문에 지적질 본능은 어쩔 수 없다) 남편과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정한 가정교회에서 나눔의 법칙은 '경청과 질문'이었다. 잘 듣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 물어봐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조언은 상대가 물어볼 때만 내놓기로. 어쩌면 그것을 몸으로 체득하는 연습이 수년 목장모임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열매 같다. 내가 사는 얘기도 그렇지만 결국 같은 패턴을 맴돌며 부부가 갈등하고 화내고 섭섭해한다. 4년이 지나도 7년이 지나도 그 패턴은 비슷하다. 여전히 같은 문제로 기뻐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 처음 이들을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참 많이 변했다, 생각하다가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하며 웃는다. 나와 남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지. 그때도맞고지금도 맞다. 그때도틀리고지금도틀리다.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이 좋다는 것!

 

# 3

생각해보니 우리 식구말고 내가 한 밥을 제일 많이 먹어준 사람들이다. 이들 때문에 요리실력이 늘었고 요리창착꼼수 9단이 되었다. 그저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먹을 수 있다는 건, 오래 오래 삐지지 않고 마주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흔하고도 희귀한 일인가. 한때 내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타인들이었다. 가끔 꺼내보는 기억의 구슬 하나가 있다. 수현이네 장남 병준이는 태명이 우리 채윤이와 같은 '푸름이'였다. 병준이가 태어나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엄마당, 아빠당, 병주니당, 틴티리이모당......' 이런 감동적인 명언을 남겼다. 띤띠리 이모를 가족대우 해준 것이다. 아이들이 주는 직급은 그야말로 직급 그 자체이다. 난 이 명언이 너무 맘에 들어 특별한 기억의 구슬로 간직하고 있다. 물론 기억은 과거의 일이라서 가끔씩 꺼내봄으로 족할 뿐이다. 그렇게 그리워할 뿐이다.

 

# 4

다들 돌아가고 정리를 하는데 얼마 전 복면가왕에서 들을 '양화대교'를 자꾸 마음으로 부르고 있었다.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한 4년 후에 다시 보자고 농담하며 헤어졌다. 기억의 관계로 돌아가 가끔 구슬이나 꺼내보는 사이로 살아가겠지만.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고 마음 먹어서 행복하게 되고, 아프지 말자고 약속 걸어 아프지 않을 걸 알면서 자꾸 부르게 되는 노래이다. 그걸 알기에 이렇게 절절하게 심금을 울리는 것일게다. 늘 같은 문제를 나누면서도 속시원한 해결책 한 번 만나보지 못했고 눈이 번쩍 뜨이는 기도응답 없는 것이 살아가는 여정이다. 이들과 함께 하던 시절에 속시원한 해결책을 줄 수도, 뾰족한 도움을 줄 수도 없어서 속울음 같은 기도를 해야 했었다. 해 줄 건 기도 밖에 없어. 라고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무력한 언니의 기도 같은 것이다.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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