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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시대를 건너는 마음의 힘 본문

인간의 얼굴을 가진 리뷰

악의 시대를 건너는 마음의 힘

larinari 2017.12.21 15:41




2017년 나의 '올해의 저자'는 '강상중'이다. 남편이 사들인 소설 몇 권 중 제목 때문에 집어든 <마음>이 첫 만남이었다. 정치사상사를 전공한 재일 학자의 첫 소설이라니! 이런 사람의 마음엔 어떤 소설이 들어 있을까? 첫 페이지 [한국의 독자들에게] 쓴 서문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시작하더니 세월호로 잃은 우리 아이들, 그리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을 맺으니 계속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란 제목을 달고 어찌 죽음에만 붙들려 있는지, 썩 공감은 되지 않는 상태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리고 알라딘에 들어가 '강상중을 검색하기'를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여섯 권의 책(가족 이야기를 쓴 <어머니>도 있는데 사진에 못 담았다)으로 강상중의 사유를 추적하며 늦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았다. 마음의 강 바닥에서 맞닥뜨리는 것은 죽음이고 또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악이라는 듯. 모든 책에서 죽음과 악을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악은 대부분 시대의 옷을 입고 개인 앞에 등장한다. 정직하게 마주한 마음 안에는 무의미와 불안이, 그것을 유발한 이유를 찾아 두리번거리자니 자아에 갇힌 개인의 욕망과 시대의 악이, 때로 국가 권력과 결탁한 노골적 거짓이 보인다. 강상중의 책에서 보이고 지금 내 현실에서도 보인다.

마지막으로 읽은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의 마지막 챕터는 필사를 했다. 내용이 좋은 곳은 많아서 책마다 붙여 놓은 포스트잇이 다닥다닥이다. 조금 깊이 마음에 담고 싶어서, 만남의 여운을 좀 가지고 싶어서 필사 했다. 문장이 좋은 글 위주로 가끔 필사를 하곤 하는데, 글쓰기 향상을 위한 실용적인 공부이다. 이번 필사는 일종의 목례였다. 그의 내밀한 사유와 성찰을 일방적으로 관람한 것이 되지 않으려고, 예의를 갖춘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좋은 책에 대한 최고의 답례란 정성스런 리뷰이겠으나 그러지는 못한다. 뭐랄까, 사실 서평을 유발하는 책도 아니다.

예를 들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읽고 딱 부러지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니고,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읽는다고 힘이 불끈 솟는 것도 아니다. "계속 살아야지 어쩌겠어. 무의미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불안과 악을 회피하지 않고 견뎌야지, 뭐 어쩌겠냐고" 희망을 주되 포기하지 않을 만큼의 희망만, 힘을 주되 코앞의 부조리를 견딜 힘 정도만 주는 고약한 책이다. 그래서 좋은 책, 좋은 저자였다. 매일 흔들리고, 매일 좌절하고, 늘 포기하고 싶은 이대로 가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확신 만큼은 주기 때문에. 고민하는 힘은 살아갈 힘이다.

'세간(世間)'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강상중은 세간에서 찾는 것 같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을 분석하며 말한다. '하지만 소세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세한 일상, 아무래도 좋은 세상 사람들의 심정이나 감정 그리고 인간관계 속의 밀고 당기는 모습 등을 섬세하게 그렸습니다. 실은 바로 거기에야말로 사회가 생생하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소세키는 틀림없이 사회와 국가를 생각하기 전에 '세간'을 생각했습니다. 라고 한다.

혁명적인 로맨티스트는 세간을 무시하고 모멸합니다. 세간 따위는 단순한 질곡에 지나지 않으니 언급한 필요도 없다며 멀리 내던지고 고매한 이상만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요. 자연주의 문학도 마찬가지로 세간을 원수처럼 취급하며 자신이 독을 품은 세간의 이빨에 얼마나 크게 상처 입었는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는 일종의 로맨티시즘으로 결국에는 악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근본적으로 세계는 타락하고 만다는 저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치즘에도 이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유대인이 세계를 타락시켰다고 악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지요.  


결국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은 세간을 마주하는 힘이다. 라고 쓰고 나니 어떤 글귀가 자꾸만 맴돈다. 

현재를 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현재를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는 줄 알기에.
이 고통스럽고도 행복한 거룩한 현재를 겸허히 끌어안는다.

마포나루에는 언제 찾아가도 늘 현재로 흐르는 강물이 있다.
거룩한 현재가 있다.


민망하게도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에필로그로 내가 쓴 글이다. (아, 나도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을 응시하고 살아내야 한다. 다시 강상중이 말한다.


그가 응시하고 있는 '세간'이란 형명 투사나 가부장적인 폭군과는 거리가 먼 가족이나 친구 관계였으며, 달리 어찌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얽매임이나 애증의 인간관계였습니다.


샤이니 종현의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채윤이가 며칠 째 밥도 잘 먹지 못하고 눈물 바람이다. 충분히 알 것 같은 슬픔이다. 제대로 귀 기울여 음악 들어보지 못한 나도 순간순간 마음이 아득한데 아이의 마음이 어떨까. 너무도 아까운 생명을 너무 속절 없이 잃고 있어서 무력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강상중 선생도 아들을 잃었다. "이런 비참함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던 끝에 아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라고 했다. 어쩌면 종현도 비슷한 이유일 거라 생각해서인지 꿈에 강상중 선생과 종현이 함께 나왔다. 마음과 죽음과 악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들 세간에 있는 실존이다. 어제 아침 막막함으로 펼친 메시지 성경 히브리서에서 나 보란 듯 이런 말씀이 적혀 있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고난을 겪으신 것은, 천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 곧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면에서 인간의 삶에 들어오셔야만 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죄를 없애는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서실 때, 이미 모든 고난과 시험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베푸실 수 있습니다. (히 2:16-18,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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