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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사람

93세 할머니 메소드 연기

larinari 2017.07.15 11:22



# 옛날에


동생의 존재는 내게 '전쟁터 세상'을 가르쳐주었다. 맛있는 것, 좋은 것을 독차지 할 수 없는 세상. 둘 중 하나가 혼나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든 나는 살고 봐야 하는 세상. 동생을 마주하면 알 수 없는 전투력이 뱃속에서부터 꿈틀거린다. 친정에 가서 동생과 식탁에 마주 앉으면 가장 맛있는 걸 빨리 먹어치워야 할 것 같은 조급증이 생긴다. 옛날 옛날에 몸에 밴 습관이다. 내가 덜 가지고 덜 먹는 건 상관 없지만 동생이 더 먹는 것, 더 가지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이왕 혼난다면, 어떻게든 동생이 한 개 더 혼나게 만드는 것이 어린 시절 중요한 이슈였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공격이 가정예배 시간에 웃음보 터트리기인데. 돌아가며 성경 읽는 시간에 내가 읽는 부분이 끝나고 동생이 받아 읽어야 할 순간. 말실수 같은 걸 던져서 동생 웃음보가 터지면 압승이다. 수습되지 않는 웃음보는 결국 예배 끝나고 혼나는 걸로 마무리 되기 때문이다. 기도 시간에 엄마 아버지 눈 감고 있을 때 둘이 눈 뜨고 소리 안 내고 웃기는 건 리스크가 큰 모험이지만 자주 감행했다. 설령 걸려서 혼나더라도 나보다 동생이 1만 더 혼나면 만족이었다. 그때 계발한 기술이 콧구멍 벌렁거리기 같은 것이다. 소리 안내고 눈만 마주치면 웃길 수 있는 테크닉이다.


아웅다웅 티격태격 엄청 싸워댔다. 가끔 육박전도 했는데, 국민학교 5, 6학년 때 쯤 어느 날, 늘 하던 개싸움 육박전이 시작되자마자 동생이 먼저 나를 깔고 뭉개는 전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그날 이후로 육박전은 조용히 그만 두었다. 늙은 엄마 아버지를 놀리기 위해서는 가끔 의기투합을 하기도 했다. 엄마가 하는 방언 기도나 찬송 가지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 등. 어찌됐든 동생의 존재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독차지' 하고픈 내게는 치명적인 걸림돌이었다. 동생 앞에만 서면 전투력이 상승했다. 현명한 부모님이 최소한의 싸움을 위해서 몇 가지 원칙을 주셨는데 그 중 하나가 '반띵의 원칙'이다. 손님이 오셔서 용돈을 주시는 행운의 불로소득이 있을 때, 얼마나 행복했던가. 문제는 둘 중에 하나만 집에 있는데 손님이 오신 때이다. 동생이랑 나눠가져, 라는 말일 붙이는 경우와 그냥 주시는 경우. 내게는 엄청난 차이인데 밖에 있다 돌아온 동생에겐 내게 없는 돈 100원이 누나 손에 있다는 것 외에는 보이지 않으니 내놔라, 누나가 안 주면 엄마가 주라, 난리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래서 만드신 법이 '반띵의 법' 일명, 남내 불로소득 공산주의 시스템이다. 손님이 나눠 가져라, 하지 않아도. 예기치 않은 모든 불로소득은 무조건 반띵이었다. 100원이 생기면 50원 씩, 50원이 생기면 집 앞 가게에 가서 '10원 네 개랑 5원 두 개로 바꿔주세유' 해서 나눠 가졌다.


# 간만에


김포에서 흑석동으로 주일 예배 가는 날이 엄마에겐 최고의 날이다. 아침에 예배 전에 태워 드리고, 오후 예배 마치면 모시러 가는 것이 동생의 주일 일상이기도 하다. 주일 집에 가는 길에 꼭 동생이 전화를 한다. '누나, 엄마가 나 돈 줬다.' 우리 자랄 적에 그렇게 돈돈 하던 엄마가 돈에 대해서 완전 '내려놓음'이 되어가지고. 돈이 좀 모여지면 주는 게 일이다. 주일에 교회 가면 최고령 권사님인 엄마에 대한 애정으로 몇 만원 씩 용돈을 드리는 분이 계신가보다. 그걸 집에 가는 차 안에서 동생에게 기름값이라며 주고, 동생은 여지 없이 내게 전화하여 염장질을 한다. '엄마 바꿔, 엄마 바꿔! 엄마, 운형이 돈 주지마. 나도 줘.' 폰에 대고 떼를 쓰면 엄마가 무척 좋아하신다. 그러면서 또 '야야, 나 데리고 사느라고 운형이 선영이가 심(힘)들어. 나 먹을 거 사다 대고 심(힘)들어. 노인에 하나 데리고 있는 게 얼매나 심든줄 아냐?' 하신다. 주중에 전화를 했더니 '얼라, 우리 딸 보고 싶었는디 전화를 혔네.' 하기에 '엄마, 운형이 돈 주지 말고 모았다가 나 줘. 20만원 모아 놓으면 내가 엄마 보러 갈게. 나 보고 싶지? 운형이 주지 말고 20만원 모아 놔.' 생떼를 썼더니 또 좋아한다. '얼라, 너 사모가 그르케 돈 좋아허믄 못 써. '하면서도 '20만원...... 은 그거 나라에서 주는 거 그게 나와야 되는디..... 궁시렁궁시렁' 하다 끊었다.


# 메소드 연기


며칠 뒤어 엄마를 보러 갔는데 신실아, 신실아 조용히 부르더니 꼭 쥔 주먹을 내 손바닥 위에 놓는다. 눈 찡긋, 찡긋. 빨리 집어 넣어. 우힛, 꼬깃꼬깃 만 원 열 장이내 손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동생과 마주 앉았다. '엄마, 누나 돈 줬어?' 이 순간 와, 우리 엄마 메소드 연기. '참나, 내가 돈이 어딨다고 돈을 줘워?' 천하에 촉 좋은 동생이 속았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시침 뚝 연기였다. 며칠 후 동생하고 통화하며 '야, 엄마가 나 돈 줬다. 몰랐지?' 제보하고 '엄마 취조하고 재밌는 거 있으면 말해줘' 했다. 좋은 것 두고 무조건 경쟁하는 것이 습관이 된 남매, 평생 남매 사이에서 알아도 모르는 척(엄마, 아까 낮에 오셨던 아버지 친구 목사님이 누나 돈 줬지? 나 없을 때 줬지? '아니~이!'), 몰라도 아는 척(엄마, 낮에 오신 목사님이 누나 100원 주셨어? 200원 주신 거 아니지? 누나가 나 50원 줬어. '50원 줬으면 100원 받았겄지~!) 했던 엄마. 93세 메소드 연기 엄마는 아들의 취조에 어떻게 응할 것인가, 두둥!


#  93년 내공의 리액션


이제부터 동생 보고이다. 운동하러 나가면서 엄마 방문 앞에서 달달하게 인사했단다. 엄마, 운동 갔다 올게~/(엄마는 침대에 누운 채로 아이컨텍을 위해 고개를 한쪽으로 든 귀여운 모습으로)이이~ 그려, 갔다 와/엄마, 선영이도 탁구 치러 갔으니까 2시 쯤 올 거야. 늦는다고 뭐라 하지마/(천진난만 밝고 순한 표정으로)그려~어, 알었어/그런데 엄마, 엄마 누나 돈 줬어? 두둥~/(귀엽게 들었던 고개를 체념하듯 베개에 떨궈 누우며, 단호하고 무표정하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려.서?! /줬다더니! 얼마 줬어? 누나 얼마 줬어?/(더욱 단호하고 시크하게) 니가 경찰이야? 니가 경찰이냐고?


이런 예측불허의 93세 시트콤 주인공 같은 노할머니라니!


* 벌써 10여 년 전의 사진이다. 엄마는 지금 성경을 읽지 못한다. 돋보기의 도수를 최고로 올려도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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