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가을.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하던 가을의 초입에 마법의 보자기를 뒤집어 쓰고 영화같은 사랑이 시작되었다. 단풍이 무르익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광릉수목원에서의 데이트는 단풍과 함께 로맨스의 절정이었다. 단풍색이 바래고 하나 둘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는 불안과 두려움의 먹구름에 가려 앞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몇 잎의 나뭇잎마저 모두 쓸어버릴 듯한 찬바람이 불던 11월이 때이른 추위가 기승을 부린 어느 날. 헤.어.졌.다.

1998년 봄.
4월20일. 월요일. 저 나무가 겨울의 그 쓸쓸한 그 나무였나 싶게 거리거리의 나무들은 물이 오르고 연하디 연한 생명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녁 8시경 고덕도서관에서 운명처럼 그를 만났다. 운명의 그림자는 실은 그 전날부터 둘 사이를 어른거리고 있었다. 우연히 다시 만나 차를 타고 가면서 내가 그에게 '요즘 나뭇잎 색깔이 너무 이뻐. 연두빛이 참 예쁘지?'였다.
그리고 1년 후 5월, 푸르름이 더 짙어진 도산공원의 신록 속에서 우리는 웨딩촬영을 했었다. 웨딩앨범은 온통 초록세상이다.

2009년 4월 20일.
오랫만에 둘만의 데이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영화표를 예매하고 식사하러 가는 차 안에서 그가 말했다. '나는 요즘 나무색이 참 좋아. 거무스름한 나뭇가지에 연녹색 잎이 정말 멋진 것 같아' 라고..
'그거~어, 11년 전 오늘 내가 한 말인 거 알아?ㅎㅎㅎ'



함께 본 이 영화는 인도 인권에 대한 얘기도, 돈에 관한 얘기도 아니다. 퀴즈쇼에 관한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이 영화는 운명같은 사랑 얘기이다. 이 한 마디가 정리해준다. 그들의 사랑, 그들의 운명같은 사랑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It is written!
11년 전 오늘. 우리도 5개월의 방황 끝에 운명같이 만났었다. 내 인생에 그렇게 운명같은 날은 없었다. 아핫~~~


하지만 우리의 운명같은 사랑의 쟝르는 로맨틱 코미디!
점심식사를 하면서 후식으로 키위를 한 입 베어물었는데 마주 앉으신 그 분께서, 웃을 때 소리도 나지 않는 그 분께서 함지박 같은 웃음을 지으신다. 한 입 베어 분 키위에 내 돌출치아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았다는 것이다. 너무 좋아하시며 '사진 찍어. 사진 찍어' 하시는 통에 운명같은 사랑의 날을 기념하는 이 세러모니는 코미디 한 점으로 마무리 된다. 화룡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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