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몰래, Jung을 따르다

 

때는 2007년 봄. 남편은 신대원 마지막 1년을 시작했다. 이제 1년만 견디면 된다는 안팎의 위로가 무색하도록 몸과 마음이 빠르게 붕괴되고 있었다. 몸은 성대수술을 받는 것으로, 마음은 에니어그램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으로 최악의 무너짐을 대충 막아 수습하기에 이른다.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아침에 채윤이는 학교로, 현승이는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나면 좁은 거실을 다락방 삼아 기도하고 공부하며 오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수도자의 삶 같았다. 메시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다시 공부하고. 오전을 그렇게 보내고  음악치료 하러 서울, 하남, 남양주, 과천, 의왕.....으로 돌다 저녁에 돌아오면 채윤이 받아쓰기 공부를 시켜야 했다. 주말부부로 사는 것, 일을 많이 하는 것, 한글도 안 가르쳐 학교 보낸 채윤이와 함께 공교육에 적응하는 것. 그것보다 어려운 일은 마음의 시험이었다.

 

어릴 적부터 '믿음의 견고함과 인격의 성숙함이 왜 나란히 가지 못하는가'가 너무나 큰 의문이었다. 나란히 가기는커녕 반대 방향으로의 주행은 아닐까 싶어질 때는 두려움으로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곤 했다. '에라 모르겠다. 믿쓉니다' 대학 이후로는 무엇보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괴로웠다. 머리와 입술의 믿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삶이며 떨쳐낼 수 없는 마음의 짐들은 풀 수 없는 숙제 같았다. 그 분열을 오가며 그럭저럭 살았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그 이후로 음악치료를 하면서 무엇보다 결혼을 통해서 '분열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남편이 신학을 하고 평신도 아닌 사역자로 살게 되면서 이 의문은 날이 벼리고 더욱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를 찔러댔다. 내 영혼을 찔러댈 뿐 아니라 내 일상의 숨통을 죄었다. 위선적인 목회자들에 대한 분노가 도를 넘은 것 같았고 분노는 살기가 되고 그 살기는 내 영혼부터 말려 죽이고 있었다. '교회' 자체를 떠나고 싶었다. 교회를 떠나 오직 하나님 품에만 안기고 싶었다. 바로 그때 에니어그램 통해 아주 희미한 빛을 발견한 것이다. (성찰 없는 그리스도인, 신앙의 행위를 신앙이라고 믿고 강압하는 것들, 그런 얘기는 <커피 에니어그램> 에필로그나 블로그를 통해 수도 없이 말했다.) 에니어그램을 공부하면서 융(Carl Jung)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융에게서 '믿음과 정서적 성숙의 불일치'에 대한 오랜 의문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삶은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융 관련 저작물이었다.

 

2007년 봄, 나를 살린 책은 달라스 윌라드 <마음의 혁신>, 고든 스미스 <예수의 음성>과 더불어  이부영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으로 만난 융 분석심리학이었다. 그때로부터 독학으로 융을 공부하게 되었다. 하나의 책은 또 다른 책으로 길을 내주고 한 저자는 또 다른 저자를 소개하며 여정을 인도해주었다. 돌이켜보면 공부, 진짜 공부였다. 자발적인 공부였고,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었고, 읽은 것을 소름 돋도록 경험으로 가져와 이해했다. 융 분석의 안내를 따르다 다다른 곳이 '꿈'이었고, 오랜 기다림 끝에 작년 한 해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 배울 수 있었다. 가톨릭에서 배운 에니어그램을 내 나름 개신교의 신학으로 필터링하여 글을 썼던 것처럼 융 심리학을 그렇게 녹여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졌다. 신앙 또는 기독교 영성과 분석심리학을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가? 늘 떠나지 않는 고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고, 에니어그램을 약간 섬기고, 게다가 융까지 겸하여 심기고 있는 위험한 여자라는 것을 남편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몰래 몰래 융을 만나고 섬겼다.   

 

 

지지받다

 

어느 인터뷰 글을 통해 모새골 임영수 목사님께서 스위스 융연구소에서 수학하셨으며 거기 계실 때 폴투르니에 박사님과 깊은 만남을 가졌다는 것을 읽었다. 흠.... 몰래 사교를 믿는 것처럼 공부해왔는데 임영수 목사님이라니! 지지받은 느낌이었다. 또 작년에 우리 교회에서 열린 정신건강 세미나에 오신 장신대 유해룡 교수님의 강의는 내내 융 심리학 이야기였다. 이런 일들로 지지를 받아 '카를 융에 물든 부족한 그리스도인'이 블로그를 통해 서서히 커밍아웃 했던 것이다. 작년 가을 MBTI를 도구 삼아 소그룹으로 부모교육을 몇 주간 진행하였다. 늘 그렇듯 MBTI는 손가락일 뿐, 손가락으로 가리키고자 하는 '달''나와 자녀, 나와 부모관계를 짚어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성찰하는 엄마, 나 자신이 되는 엄마가 되자는 것이었다. 과정을 모두 마쳤는데 아쉽다며 지속적으로 배움과 나눔을 할 수 없겠냐는 요청을 해왔다. 궈래요? 그러면 일단 다음 주 강의 하나 더 듣고 결정하세요. 융의 마음의 구조에 대해 얘기할 요량이었다. 대한민국 보통 엄마들에게 융을 말할 수 있게 되다니!  정말 설레는 일이었다. 야심차게 준비한 강의, 어려워 하기도 했지만 정말 열심히 듣고 잘 알아듣는 것 같았다. 아이들 방학 지내고 마음을 돌보는 글쓰기 모임으로 다시 만나자며 새봄을 기약하고 마쳤다. 또 한 번의 지지받는 경험이었다.

 

그 즈음, 김정택 신부님의 융 분석심리학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고 그때 용기내어 질문했다. 혼자 공부하며 신앙과 융심리학의 통합에 관해 오래 품었던 의문이었다. 에둘러 답하셨지만 내겐 명확하게 오는 것이 있었다. 그보다 인상 깊었던 것이 있었으니! 내 질문후에 어느 여자분이 약간 격앙된 태도로 다른 질문했다. 남성성과 여성성, 아니마 아니무스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무엇 때문이지 꽤 화가 나 있었고 공격적인 태도였다. 신부님은 의외로 허허 웃으시며 '제가 개인적으로 융 심리학으로 얻은 유익을 컸고, 그 고백을 했지만 이 분석심리학은 the way가 아닙니다. a way입니다. 당연히 모든 것에 대한 정답도 아닙니다.'  이 단순한 말씀이 마음에 남아 신뢰(분석심리학이든, 융이든, 융기안이든, 그 언저리에 있는 무엇에든)가 더욱 커졌다. 서강대 교수로, 예수회 신부로, MBTI를 들여와 대중화시키는 것으로 충분히 열심히 연구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헌데 은퇴를 앞두고 융 분석가 과정을 시작하여 7년에 걸린 수련과정을 통과하여 은퇴 후에 마쳤다는 얘기에 크게 고무되었다. 그렇다면 나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다, 결심하다

 

대로 분석가가 되려하며 높디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한다. 이부영 교수가 수장으로 있는 '한국 융연구원'을 통한 분석가 과정을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랜 시간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다 융연구원 자문 교수이며, 목사인 분석가가 운영하는 연구소를 알게 되었다. 이 연구소의 디플로마 과정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한국 융 연구원에서 1년에 한 번 여는 분석심리학 강의가 있어서 등록을 했다. 내가 찍어둔 연구소의 분석가라는 분도 강의 하나를 하지 않겠나 싶어 나름대로 검증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이 나이에, 어떻게 시작하는 공분데 섣부르게 시작할 수는 없으니까. 한국의 융분석가들이 어떤 분들인지, 어떻게 가르치는지도 몹시 궁금했다. 이틀에 걸쳐 10여 개의 강의를 연달아 들었다. (한 줄 평은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예상대로 그분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십여 명의 강사 중에 '내가 했다, 나는 누구에게 분석을 받았다. 나는 어딜 가봤다' 며 주어 '나'를 강조하는 말이 유난히 많아서 마음에 걸렸지만 대체로 괜찮았다. 강의 마치고 디플로마 과정 해보려 한다며 인사를 했다. 당장 그주에 개설되는 꿈분석 과정이 있으니 그걸 먼저 들으면서 시작하라는  말을 듣고 고민이 깊어져 돌아왔다. 

 

 

비운의 외팔이 되어 허망하게 돌아오다

 

고민은 사실 비용이었다. 뭘 더 배우냐, 얼마나 더 배우냐, 여자가 그만큼 배웠으면 됐지, 우리 엄마 목소리가 막 올라왔다. 엄마로서 나 자신의 목소리도 질세라. '그럴 돈 있으면 채윤이 레슨비를 해야지, 뭔 소리야' 왜 내 인생은 이 모양이지? 한숨 푹푹 쉬고 있는데 남편이 '일단 내일 것부터 들어. 해! 해! 정신실 공부해야지. 내가 대줄게.' 하며 바로 입금을 했다. (오빠, 멋져!) 그래, 이 열정 어쩌겠는가. 그렇게 시작하여 첫 시간, 그리고 두번째 시간에 가서 사단이 났다. '다음 시간부터 나오지 않겠습니다'며 내 인생에 몇 번 없는 뷁!을 하고 나왔다. 자신의 배움과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다른 길들에 대해서 너무 쉽게 부정해버리는 것에 참을 수가 없었다. 오직 융만이 옳고, 융이 옳듯이 융분석을 제대로 공부한 자신만이 옳다는 선민의식에 꽉 찬 것처럼 느껴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융을 20년 공부한 사람이 타인의 삶과 공부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다니!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한 고혜경 선생을 위해 내가 이렇게 싸웠다는 것을 적에게든 아군에게든 누가 좀 알려주면 좋을텐데) 아무튼 다행인 것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왔다는 것. 그럼에도 견딜 수 없는 것은 분석받다 콤플렉스가 건드려지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방어하느라 화내고 퇴장해버린 찐따가 되었다는 것. 추운 밤, 충정로에서 이대까지 그냥 걸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또 어디인가?

 

 

결국 내 병이었다

 

집에 와서도 새벽 4시가 되도록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먼길을 돌아 어렵게 결단하고 찾아간 곳에서 이게 무슨 일인가? 이 하나님은 또 시작이시다. 처음부터 이 길 아니라고 하시든지. 지난 몇 달, 아니 길게 잡아 수년 머리 싸매고 고민한 시간이 허망하지 않은가. 늘 당하면서도 막상 당할 때마다 당황이 되는 일이라 당장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쓰기 시작한 이 글, 지금 한 달째 쓰고 있다.)  융의 제자를 자처하며 20년 공부해왔다는 한 사람에 대한 실망감이 낯설지 않아서 더욱 화가 난다.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도록 안내하는, '영혼'이 있는 심리학이라는 분석심리를 공부하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이 어리석은 물음을 다시 묻고 있는 내가 진정 어리석다. 융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어떤지를 40년 넘도록 확인했으면서 아직도 사람을 보나? 참으로 헤어나오기 어려운 굴레이다. 권위자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고, 이상화시키고, 실망하고..... 마이 했다 아이가~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내 오랜 병이여.

 

 

Jung이라는 사다리

 

생각이 여기에 다다르자 복잡하고 어려웠던 마음이 서서히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이어 우연같은 필연으로 좋은 분들과의 긴 만남, 깊은 대화가 있었다. 머리 터져라 고민하며 두 주먹 불끈 쥐고 '그래, 해보는 거야' 하는 나를 팔짱 끼고 바라보던 하나님이 다 생각이 있으셨던 게다. 혼자 가야할 때 혼자 가도록 두시고, 들을만 한 귀가 생겼을 때 필요한 목소리를 만나게 하시니 말이다. 먼길 돌아서 다시 제자리에 서게 하시는, 그러나 다시 선 제자리가 접때 그 자리가 아니게 만드시는 기묘한 방식. 헤어나올 수 없는 내 아버지의 매력이다. 왜 그리 디플로마, 디플로마, 하면서 뭔가 더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그걸 이제 알겠다. 에니어그램 공부에 한참 빠져 있을 때 남편이 그랬다. '당신이 에니어그램으로 사람을 이해하는데 충분히 도움을 받고, 그 다음엔 에니어그램을 버려. 버려야 소통할 수 있어.' 맨 처음엔 그 말이 그렇게 고깝게 들렸었다. 이제 내가 내게 말한다.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열심이 읽고, 공부하고, 경험을 녹여 다시 읽어서 배운 후에 융을 버리자. 자연스럽게 융을 버릴 수 있을 때 다시 한 번 껍 껍데기를 벗을 수 있겠구나' 조바심에 달달거리던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고 감히 융 선생님을 '사다리'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 같다. 그런데 왜 나는 꼭 이 모양일까?  처음부터 사다리로 볼 수는 없었던 걸까? 내 이 유아적인 '권위자- 의존성-이상화-신드롬'은 언제까지냐고. 게다가 융 선생님이 뭐라 하시는가? 진정한 소명은 밖이 아니라 너의 내면을 들여다 볼 때 찾아진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음 단계 인생의 소명을 위해 디플로마니 라이선스니 하면서 융 공부를 위해 밖으로 밖으로 헤매며 희번덕이던 눈동자, 제발 좀 차렷이다! (이상한 신드롬에 '자학성'이라는 말을 붙일 걸 그랬나?) 사다리를 치우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됐다. 멈추고 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  

 

 

 

Your vision will become clear only when you look into your heart.

Who looks outside, dreams. Who looks inside, awakens.   - Carl Gustav J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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