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마음을 표현할 언어가 거의 없다. '내 마음속 대통령' 같은 표현도 있고, 존경이나 사랑이라 할 수도 있지만 어쩐지 다 담아지지 않는다. '노사모'였던 적은 없다. 그를 그리워하는 노란 모자의 물결 같은 걸 보며 연결된 느낌으로 적잖이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노사모라서는 아니다. 군중 속의 하나로 그분을 좋아하거나 따르는 것 아니다. 진영, 집단적 감정은 더더욱 아니다. 

 

말이 아니라 삶 때문에 좋아했고 존경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분이었다. 예수 따르는 사람이라 자처하는 어른들에게 실망하여 교회에 대한 소망이 끊어졌던 시절, 그래서 삶의 소망도 끊어졌던 때가 있었다. 그 즈음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하필 그 시절이어서, 그 죽음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신앙의 빛이, 영혼의 불이 꺼진 것 같았다. 다행히 그 캄캄한 밤을 통과하며 '정답' 없이 의문을 품고도 신앙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한때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존경하는 어른이 누구냐?는 물음에 신앙 공동체 안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내 마음속에 노무현 대통령 같은 어른이 없다. 어쩐지 이것이 좀 부끄러웠다. 이젠 조금 당당해졌다. 생각해보면 가장 멀리 떨어지고 싶은,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정말 많은 에너지를 들여야 관계가 유지되는 사람들이 대부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다. 존경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일은 부끄럽지 않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서거 11주기 지나며 유난한 그리움으로 봉하에 다녀왔다. 장거리 운전이 힘들어 당일 일정은 어려워졌다. 교대로 운전을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박 여행으로 계획하고 밀양에 숙소를 예약해뒀다. 전날 내적 여정 세미나 마치고 와 늦은 밤에 예약한 숙소를 취소하고 창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모님 한 분을 만나야지 싶어서다. 창원에서부터 내적 여정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는 사모님이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데, 아이 둘을 데리고 ktx를 타고 올라와 시가에 맡기고는 세미나에 왔다. 코로나 19로 이후 일정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목마름이 전해져 왔다. 잠깐이라도 가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남편끼리 신대원 동기라서 더욱 좋은 일이었다. 

 

끌리는 마음 어쩔 수 없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렇게 덥석덥석 만나질 않는다. 하지만 끌리는 사람은 바빠도 만난다. 멀리 있어도 만난다.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난다. 어렸을 때, 젊었을 때는 '만나야만 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고 배워서 그렇다.(도대체 누가 내게 가르친 것이냐) 애써 어려운 만남을 찾아다녔고, 기웃거리고 집적거렸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며 주먹 꽉 쥐고 애를 쓰곤 했다. 그러고 살며 꽉 쥔 손바닥은 내 손톱에 찔려 피가 날 정도였지만. 돌아보면 그것도 좋은 일이었다. '한계'는 몸으로 부딪쳐 배우는 게 제일이지. 

 

철학 상담과 영성 공부를 통해 얻은 배운 가장 큰 것은 '사랑이 있는 곳'을 거침없이 찾아가는 힘이다. 찾아간다기보다는 생명과 사랑의 흐름에 몸을 맡겨 흘러간다고 하는 게 좋겠다. 사랑은 무엇을 목적하지 않으니 힘을 빼고 목적의식을 흐릿하게 하면 어떠리. 가르치고, 배우고, 교훈을 얻고, 구축하고, 지키고, 감동을 주고...... 그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고 그저 만나는 것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퍼뜩 생각나는 사람을 거침없이 만나고. 장거리 운전이 안 되는 낡아진 몸이 되어가고 있으니, 마음의 힘도 더 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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