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월요일,
심학산 둘레길을 걷기 위해 파주로 가는 차 안에서 남편이 물었다.
여보, 내가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
성경 전문가가 되겠다며? 하루 성경 12 장씩 읽고 있다며?
그것 말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때는 이 때다, 하면서 (늘 언제나 다다다다 쏟아낼 만전의 준비가 되어 있는) 남편 성격의 취약점에 관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도착하여 밥을 먹고 걸으면서 진지하게 얘기했다. 뾰족한 결론이 나는 얘기도 아니고, 일면 얘기할수록 더 답답해지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에게 '내 약점을 말해줘'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것이 새삼 고마웠다.


아, '우리가 서로'는 아니다. 약점에 대한 지적(질)을 잘 듣는 사람은 애초부터 남편이었고 나는 이 지점에서 상당히 취약했다. 그리고 여전히 취약한 편이다. 전에 교회에서 설교할 일이 많았을 때, 수요예배 설교를 마치고는 늘 그렇게 말했다. '설교에 대해서 논평을 하되 먼저 잘한 점 세 가지 얘기하고 그 다음에 잘못한 거 한 가지 얘기해' 약점에 관해 듣는 것은 언제나 아픈 일이기 때문에 방어할 수 있는 만큼의 바운더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이러한데 나는 열 개를 칭찬하고 한 개를 지적(비슷하게만) 받아도 마음이 상해서 입을 닫곤 했었(한)다.


지지난 주였던가. 남한산성 드라이브를 하면서 나눈 얘기다. 우리 부모님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노부부들은 서로에게 깊은 빡침을 품고 일생을 살아오는 것 같다는 얘길 했다.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깊은 빡침이 노년의 부부생활을 어둡게 하고 그것이 자녀들의 짐이 된다. 그런데 노년의 부부 뿐이랴. 우리 또래의 부부들도 마음 깊은 곳에는 다들 한두 가지 씩 배우자에 대한 깊은 빡침을 품고 있을 것이란 얘길 했다. 남편이 내게 당신도 있냐고 물었고, 나는 빡침이 깊어지기 전에 이미 다 입으로 몸으로 해버리기 때문에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난 얼마나 남편을 들들 볶는 여자인지. 남편에게서 풍기는 신학적, 철학적 풍모는 다 크산티페 같은 내 덕이다. 믿어지지 않을테지만 사실이다. 어쨌든 그러느라 깊어질 빡침이 없는 것 같다고. 그 다음에 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의 어떤 면에 대해서 가슴 속에 묻어두고 포기하고픈 힘든 점이 있냐고. 그 순간 밖의 경치를 보라는 둥, 말을 돌렸다. 있는 거다! 분명히 있는 거다! 평소 남편을 못살게 구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당신의 감정을 억압하지 마라. 화가 났으면서 왜 아니라고 하느냐. 화가 나면 화를 내라'이다. (진짜 화내면 그걸로 며칠 갈 거면서) 그런데 그게 남편의 미덕인 것을 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남편이 나를 못 믿는 것이다.  내 말에 말려 '어, 실은 깊은 빡침이 있는데 뭐냐면....' 털어놓으면 여파가 크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굳이 여기까지 상상하진 않았더라도 어쨌든 남편은 지적하는 말을 삼킬 줄 안다. 나 역시 더 묻지 않았다. 있긴 있구나! 만을 캐치했다.


몇 주 전에 함께 유해룡 교수님 강의를 듣고 '나는 내 그림자, 인정하기 싫은 모습을 누구에게 투사하는 것 같애?'라고 남편이 물었었다. 좋은 목회자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게 용기가 필요한 질문이다. 가장 아픈 얘기를 듣겠다는 태도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픈 얘기는 나의 약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걸 듣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가 죽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는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이것이 가능한 공동체인 것 같다. 최근 죠이출판사에서 나온 책 <공동체로 산다는 것은>이란 책에 추천사를 썼다. 갑자기 짧은 글을 써내려면 힘이 빡 들어가서 잘 되지 않는다. 때문에 촌스러운 글이 되어 조금 부끄럽긴 하다. 


"애타게 갈망했고, 피눈물 흘리며 몸으로 살았고, 몸서리 치도록 실망했고, 실패감에 주저앉아 오랜 시간을 보냈다. 도망쳐 나와 해방감을 맛보노라면 어느새 목말라 내 발로 걸어 들어가 상처받기를 자처하는 곳이 공동체다. 그렇게 살아왔건만 여전히 공동체는 낯선 땅이다. 실패라 이름했고, 미성숙함이라 이름했던 내 지난날 공동체에 대한 갈망과 투신의 경험에 위로도 되고 이정표도 되어 준 책이다."


뭘 이렇게 공동체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다. 추천사에 쓴 것처럼 내놓을 만한 성공적인 경험을 한 것도 아니면서. 다행히 남편과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 그나마 희망적이라고 느껴지는 월요일 데이트였다. 어디에 발설하기 어려운 연약함을 입에 올릴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남편과 나의 공동체는 잘 가고 있다는 뜻이란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신혼 때나 아니 몇 년 전을 생각해도 내 약점이 드러나고, 드러나면 비난받지 않을까 두려워 미리 방어막을 치고, 한 발 앞서 삐지곤 했었는데 이젠 조금 무장해제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공동체로 산다는 것>의 저자 크리스틴 폴 교수님 말씀처럼 감사, 약속, 진실함, 손대접이라는 덕목이 남편과의 관계에서, 아니 더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삶으로 살아지면 좋겠다. 가끔 희망적이라고 느낄 뿐, 막상 닥치면 이내 포기하고 싶은 아프고 힘든 일이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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