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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bath diary18_영화가 나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larinari 2015.06.11 12:28

 

 

 

 

월요일 아침 늦잠을 포기한 남편과 드디어 <윈터슬립>을 보았다. 3시간 16분의 런닝타임도 잘 견뎠다. 물도 커피도 마시지 않으니 인터미션이 필요하지 않았다. 끝나고 배가 무지하게 고팠고 식당을 찾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이 쉬운 일이 아니다. 앗, 저기 들어갈 걸, 검색해봐, 뭐 없어, 저긴 비쌀 것 같아, 주차할 곳이 없잖아, 이러다 괜히 서로 감정이 틀어질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골든타임 안에 식당을 정하고 들어가 앉을 수 있었다. 테이블 옆 서랍에서 수저를 꺼내면서 남편이 무심하게 '정신실 뇌관 건드리기' 놀이를 시작했다.

 

- 이제 속셈을 말해 봐. 영화 주인공이 나랑 닮았어?

- 뭐라? 속셈? 속셈이라니!! 난 진짜 영화가 너무 좋아서 같이 보자는 거였어. 당신 내가 그런 뜻으로 영화보자고 했는 줄 알아? 당신을 닮긴 뭘 당신을 닮아. 오히려 나를 닮았지.

- 나는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무슨 당신을 닮아? 어떤 점이 당신을 닮았어?

- 지역신문에 사람들이 보지도 않는 알량한 글 써놓고 자뻑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 아냐,  당신보단 나랑 비슷하지. 책이나 글에 빠져서 합리적인 척하고. 집세를 받고 이러는 일에서는 다른 사람 시키고 거리두고. 

- 내가 이 영화가 좋다고 한 건 바로 그것 때문이야. 누구라도 주인공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어.

- 하긴, 등장인물 셋이 다 그렇지 않아? 

- 그래. 영화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지? 그래서 현실 같지?

 

(벌컥!)

 

- 그런데 당신 내가 무슨 속셈이 있대. 내가 뭐 당신을 그렇게 통제하고 다루는 사람이야?

물론 지난 번 <Her>를 보고 당신과 닮았다과 많이 쪼았지. 인정해. 

그런데 진짜 이번엔 다른 뜻 없었어. 당신이 갑바도기아 갔다 왔고, 그 배경으로 찍은 좋은 영화를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이렇게 생각했다규! 속셈이라니.... 속셈이라니.....

 

- 그건 농담한 거야. 영화에서 니할이 계속 '속셈을 말해보라'해서 따라한 거야. 밥 먹어. 

 

(그렇게 일단락)

 

다음 날 저녁 남편의 카톡으로 '속셈'과 일대일 대응되는 사건 발생. 어이없음으로 시작하여 삐짐을 경유한 분노가 재점화되었다. 아, 내가 말했던가? 실은 내가 분노중독자라고.

 

 

 

 

뭐라? 걱정 마?

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라?

분명 오늘 아침에 당신 아들 현승에게 당신 입으로 니가 약속하셨잖아요?

당신이 강변을 나가거나 안 나가거나 내가 무슨 걱정이래요? 당신 나한테 왜 이래?

나 그렇게 나쁜 여자 아니야. 내가 언제 당신 때렸나, 생각해 보고 있음. 어이 엄슴.

 

내 뇌관을 건드린 '속셈'과 '걱정 마'에 대단한 뜻이 담기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그럴 것이다. 그야말로 속셈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괜시리 제 발 저린 내가 분노의 화살을 남편에게 돌리는 것이다. 이럴 땐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윈터슬립>에서 네즐라가 주인공 아이딘에게 쏘아붙인 명대사가 답이다. "오빠 문제가 뭔지 알아? 고통 받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속이는 거야" 내 뜻이 남편 뜻이 되기를, 남편 마음이 내 맘 같기를 바라며 은근히 통제하는 나. 남편 말과 행동 뒤의 동기를 다 아는 것처럼 단정 짓고 비난하는 나. 실은 내가 이러는 줄 알기에 남편이 이렇게 느낄가봐 두려워 늘 선제공격이다. (앗, 고백하고 말았어ㅜㅜ) 영화에 나오는 모든 주인공의 공통점은 '모두 실제의 자기보다 자기가 더 괜찮은 인간'이라 믿고 싶어 자기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다. 물론 특별히 나쁜 사람은 없다. 나도 특별히 나쁘지는 않다. 남편도 속셈을 가지고 말한 게 아니 듯.

 

여기까지 생각이 미쳐서 회개와 근신의 마음이었는데, 때마침 읽은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책의 다음 글귀가 확인사살 해주신다.

 

"만족의 현실주의(Realismus der Bescheidung)가 의미하는 것은 상대에게 쉼 없이 새로운 요구를 제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족하는 일, 또 그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일이다. 이러한 만족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에 대한 존중, 상대가 주는 가치에 대한 인정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안식을 누리지 못하며, 상대에게도 안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에 만족할 때만 우리는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아, 눼에! 신부님, 성령님, 예수님, 하나님. 잘 알아 들었습니다. 깊이 반성할테니 이런 깨달음 제게만 주시지 말고 부디 남편에게도 깊은 깨달음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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