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무지 좋다. 매우 싫다. 이런 것들이 나, 보이지 않는 나를 드러낸다.  Carl Jung의 말대로라면 내 안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은 '투사 드라마'이다. 내가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 아니 그녀에게 빠진 의외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의 어떤 것과 맞닿음. 즉 투사의 일종인 것이다. 내 마음의 결핍과 맞닿았을 때 나는 강하게 끌리는 것이다. 그림이 나를 매혹시킨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림에 관해서 '문외한'이라는 말도 과찬인 여자다. 헌데 어떤 음악이나 책에 빠져들 듯 오키프의 그림에 빠져있다. 그림이 이렇게 많은 말을 걸어오다니! 그런데 알고 보면 오키프에 빠진 이유는 다른 데 있을지도. Jung의 개성화에 대한 강의를 듣다 처음 오키프와 면을 텄는데, 이 천재적 여성 화가가 66세 되어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다는 얘기가 귀를 잡아당겼었다. 저 그림 <구름위 하늘>은 분명 비행기 안에서 본 장면의 확장이렷다.





늦은 휴가, 또는 우리 끼리 말하기는 '아주 늦은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조지아 오키프와 그녀 그림에 관한 얇은 책 한 권을 끼고. 돌아오는 날 새벽하늘을 비행기에서 보고 아하! 했다. 이번 여행이 왜 굳이 오키프였는지, 내 마음의 무엇과 닿아있는지를 알았다. 저 그림처럼 수평선 같은 하늘 끝을 보면서 '아, 이렇게 또 하나의 결핍이 결핍 아닌 것으로 흘러가는구나' 생각했다. 몇 년 전 처음 코스타에 가면서 나이 40이 훨씬 넘도록 나라 국제선 비행기 못 타봤다고 엄청 징징거리고 떠들어 댔었다. 올해는 채윤이를 대동하고 가 며칠 자유여행까지 하는 쾌거(쾌거 맞다!)를 이루었다. 떠날 때마다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출국장을 나섰는데 '언제나 우리 함께 떠나보나' 싶었다. 사실 해외여행 콤플렉스는 신혼여행에서 비롯한 것. '정직 검소 절제'의 정신을 결혼에 담겠다고 작정했으며 '당신이 가진 두 벌의 외투 중 하나는 지금 거리에서 떨고 있는 그 사람의 것이다'에 붙잡힌 젊은 시절이었다. IMF로 형편이 어려우시단 부모님 사정을 알아서 헤아려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하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해외로 신혼여행 가는 것이었다. 제주도로 간 신혼여행이 보통만 되었어도 좋았을 걸. 둘 다 어리바리 했으니! 여행 첫날 숙소에 도착하여 기겁으로 시작, 빗속의 수습, 밤새 눈물로 지새우는 트라우마를 간직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트라우마에 붙들려 주위를 둘어보니 비교할 것 투성이. 몇 년 앞서 결혼한 형과 비교하고 친구들과 비교하고. 흔한 바보놀이를 상당시간 했었다. 





친구들이 발리, 세부, 푸켓 신혼여행 얘기할 때 '그건 먹는 건가? 쩝쩝' 하고 살다보니 이제 동유럽, 이태리, 크로와티아..... 이러는 날도 왔다. 더 이상 발리, 세부, 푸켓 얘기들은 안 해서 좋았지만 이 모든 것이 내 생애 따라갈 수 없는 진도가 되었기에 다시 '크로와티아는 먹는 건가? 쩝쩝' 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왔다. 여름마다 바쁘지만 이번 여름 남편의 바쁨이 유독 짠하게 다가왔다. 수련회 느헤미야 강해를 마치고, 일주일 후 주일예배 설교를 했는데 참 무거운 자리였다. 설교 마치고 바로 여름 피정주간이었다. 난생 처음 둘이 휴양지로 떠나는 여행이 별 논의없이 추진되었다. 남편 딴에는 결혼 17년 만에 신혼여행 빚을 갚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터. 나로서는 짧게는 이번 여름의 노고, 이 교회 와서 '새벽별 보기 운동, 천 삽 뜨기 운동'식으로 일한 5년, 길게는 신대원 입학 후 한 번도 제대로 쉬지 않고 10년을 달려온 남편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신이 가진 두 벌의 외투' 신드롬에 사로잡힌 터라 좋은 걸 누리는 것에 과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남편과 마누라 아닌가. 그것마저도 내려놓고 짧은 시간 결정하고 별 준비도 없이 그냥 막막 다녀왔다.




남편과 사귀기 시작했을 때, 결혼한 친구들을 만나 '얘들아, 드디어 나도!' 공개하던 날이었다. 어머, 어머 어떤 남자야? 그 남자 어디가 좋아? '음.... 가난하게 사는 게 생의 목표래. (아득한 눈빛... 아, 나의 김종필! )' 난 정말 멋진 소개라고 생각했는데 친구 한 두 명이 빵터지고 뒤집어졌다. 물론 그 다음엔 '신실아, 결혼은 현실이야'로 시작하는 설교와 간증시간. 친구들의 걱정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끼니를 걱정하며 살진 않았지만 불편하고 힘든 것이 많았다. 또래 사람들과 다르거나 또는 뒤떨어지는 삶이라는 자의식. 그에 대한 아쉬움? 부끄러움? 위축감?에 의연하기도 쉽지 않았다. '불쌍한 정신실' 가끔 남편 입에서 툭 튀어나오는 말이다. '정신실이 누구누구랑 결혼했으면 뭣도 하고, 뭣도 하고, 박사과정도 하고 그랬을텐데. 어쩌다 이렇게 살게 됐냐.' 남편이 이렇게 말할 땐 아주 불쌍한 고양이 같은 눈을 하고 눈물을 툭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먼산을 바라봐줘야 한다. 분위기상 그래주는 게 맞고, 이런 기조를 유지하며 득템의 기회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게.... 참, 내가 나를 생각해도 참.... 아, 여보 강의할 때 입을 옷이 마땅치 않은데. 봐둔 원피스가 하나 있어. 살까?' (이거 일급 영업기밀이지만 공개하기로 한다. 남편이 보면 속았다! 하겠지만 그는 금방 또 까먹을 거야.)




실은 오키프 여사까지 대동하여 결핍 운운한 것이 아주 큰 이슈는 아니었다. 우리 부부 사끼리는 신혼여행 원죄라 부르는 그 일조차도 결핍감이 아닌 건 아니지만 내가 다룰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가 채워준 마음의 구멍, 사랑받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으로 밑빠진 독같은 마음의 구멍을 생각하면 작은 구멍이다. 실은 내가 선택한 것도 크다. 풀타임으로 3년 일하고, 그때부턴 정말 가만히 하던 일을 하고 있으면 연차와 함께 월급만 착착 오를 시점. 아줌마들 다니기 딱 좋은 직장이라 10년, 20년 근속이 허다한 직장을 그만둔 것은 내 선택이었다. 프리랜서로서 감각이 딱 익혀지고 최소 시간에 최대 수익을 내는 방식을 알게 된 시점, 내적여정 공부와 강의, 글쓰기 같은 것들로 스르르 방향을 선회한 것도 나. 남편은 넉넉하지 못함의 죄를 혼자 다 뒤집어 쓰고 스스로 죄인 되었다. 나는 남편에게 원죄의 목줄을 매놓고는 원망과 불평으로 끌고 다니곤 했다. 그걸 묵묵히 받아내는 남편 때문에 더 큰 결핍의 웅덩이를 볼 있게 되었고, 조금씩 자라게 되었다. 이 여행 한 번만으로 족하고 또 족하며 행복하다.


이번 여행, 얼마나 즐겁고 풍성하게 보냈는지 모른다. 빗속에서 수영하고 한밤중에도 수영했다. 밥 먹는 것도 마다하고 바닷속 탐험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내가 우리 팀 중에 제일 재밌게 노는 거 같지 않아?' '아니, 당신이 지금 이 해변에서 제일 잘 놀아.' 히히, 정말 그랬다. 처음엔 둘 다 아이들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에고, 채윤이 현승이한테 미안하네. 채윤이가 좋아하겠네, 현승이가 여기 오면 얼마나 잘 놀까' 에잇, 신혼여행에 애들 걱정이 웬말! 미안함과 죄책감까지 다 떨쳐내고 그 바다, 그 풍경 안에 있었다. 17년 기다린 신혼여행인데 말이다 


(인생샷 무지 많이 건졌으나 부러움 끝에 미움이 되실까 하여 B급으로 몇 장만 공개하기로. 이 멋진 사진들 자랑할 곳이 없어 큰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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