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istory-photo-1

 

 

1년 동안 밥 먹고 피아노만 치던 채윤이가 입시를 마치고 해방되었습니다.
해방된 첫 날 현승이를 끌고 지하철을 타고 덕소의 할머니 댁에 갔습니다.


이렇게 되면 엄마가 해방되는 것입니다.
두 녀석이 커플 조끼 입고, 등에 잠옷 든 가방 하나 씩 매고 현관문을 나가자마자
'해방되었네. 해방되었네~' 찬송이 저절로 나옵니다.


동네 골목 안에 주택을 개조한 카페가 생겼습니다.
자전거 타던 두 망아지가 발견하고 '엄마, 한 번 가봐' 라고 알려줬더랬죠.
어제 교회의 중요한 행사 치루고 안식이 필요한 남편이 간만에 정시 퇴근하였습니다.
남편인들 해방된 거실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둘이 오붓하게 저녁을 먹고 산책 겸 새로 생긴 카페에 다녀왔습니다.


인테리어에 신경도 많이 쓰고('신경'이라고 쓰고 '돈'이라고 읽는다) 커피 맛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한 개도 없어서 쓸쓸했습니다.
바짝 긴장한 젊은 사장님을 보니 괜한 걱정이 앞섰습니다.
장사가 잘 돼야 할텐데......


사실 입시에서 해방되어 좋다고 할머니댁으로 간 덕에 엄마에게 까지 해방된 채윤이가 덕소에 도착하자마자 확인한 것은 입시결과 발표였습니다. 오후 10시 이후에 발표가 난다고 했었는데 챈이는 계속 확인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안 되어 '엄마, 나 떨어졌어' 하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생각보다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아픕니다) 에이, 덕소 보내지 말 걸.....
곁에서 안아줘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챈을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입니다.
잠시 느낀 해방감의 기쁨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채윤이 역시 그럴 것입니다.

잠시 해방되었다가 바로 실패, 좌절의 '덫'에 걸려버린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성공보다는 실패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 알지만
아픈 건 아픈 겁니다.
일단 합격한다 해도 맘 편히 보낼 수 있는 여건이 안되는 형편이지마 그렇다고
'떨어져서 잘 됐네'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항상 '잘 되는 나'가 가능한 일도 아니고, 그것이 꼭 좋은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되길 바라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므니지 않습니까.


카페에 가면 야박한 평점을 주는 편입니다. 보통은 질투심 때문이지요.
(언젠간 카페를 하고야 말겠습니다.)

이 집은 인테리어가 아니네. 커피 맛이 아니네. 주인의 태도가 아니네... 하면서요.
오늘 간 카페에선 그런 것들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냥 주인의 긴장된 표정을 보면서 '장사가 잘됐으면... 잘됐으면 좋겠네' 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나를 향한 마음일 것입니다.
잘됐으면 좋겠는 마음. 실패나 아픔 같은 건 내 삶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 여정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


스캇펙이 말했습니다. '모든 축복은 저주를 품고 있다'고.
그걸 알면서도 일단은 눈 앞의 축복이 좋은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어쨌든 지금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현실임을 아픈 만큼 아파하겠습니다.
실패는 실패니까요.


충분히 아파한 후에는 스캇펙의 말을 뒤집어서
'모든 저주는 축복을 품고 있다' 를 가식없이 말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있음을 또한 믿습니다.

 

 

 

'마음의 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흑백 일상 속의 나  (2) 2013.01.29
시기, 날카로운 무기  (1) 2013.01.12
이 날에 하늘에서 새 양식 내리네  (2) 2012.10.21
자전거 예배  (4) 2012.10.14
내 얘기 먼저 해볼께  (6) 2012.09.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