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藥이 된 冊12> QTzine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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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과 21세기를 위한 영성> 정현구, 한들출판사

‘접속할 필요도 없어. 열어 보지 말아야지. 읽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다가는 어느 새 클릭을 해서 읽어버리고는 마구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던 아프간 피랍과 관련한 수많은 댓글 혹은 악플들. 어느 새 깊은 상처와 독이 되어 마음과 몸에 퍼져서 불면의 밤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는 날들로 이어졌던 참으로 힘겨운 여름이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지난 여름이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이유는 거기 있을 것이다. 그 댓글 또는 악플들이 겨냥하고 있는 표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 소위 말하는 네티즌들이 퍼붓는 비난의 화살은 더위와 굶주림과 공포에 유배되어 있던 그 형제자매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우리 기독교인들, 나의 몫이었다는 것 말이다. 우리는 확실히 보았다. 우리가 사는 땅 대한민국에서 우리의 기독교가 위치해 있는 지점을 빨간 펜으로 정확히 동그라미 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름 우리는 할 말을 잃었었다. 그리고 자존감이라는 것이 곤두박질쳤다. ‘맞어. 우리는 그것 밖에 안 돼. 우리는 욕 먹어도 싸. 우리가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저 사람들이 교회로 와서 안을 들여다보면 더 기가 막힐 걸’

이렇게 바닥에 곤두박질 쳐 나뒹구는 자존감이 일어나 서지를 못했다. 이럴 때, 우연히 손에 들어와 읽게 된 ‘주기도문’에 관한 책이 뜻밖의 보약(補藥)이 되어 배에 힘이 들어가게 하고 영적인 원기를 회복토록 해주었다. 사실 약 기운은 약봉지를 펼치자마자 ‘서문’에 쓰인 몇 문장으로 벌써 게슴츠레 한 눈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많이 부흥했고, 또 그 존재가 많이 알려졌는데 왜 그런 것일까? 생각건대 기독교란 존재가 교회를 통해서 알려지긴 했지만, 정작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깊은 영성과 사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 예수님의 사상과 그 분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의 영성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는 것 같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다시 사심을 잘 안다 자처하며 예수님에 관한 모든 정신적 저작권을 독점하고 있는 우리들의 문제다. 나의 문제다. 세상을 향해서 ‘나 봐바. 내가 예수님을 보여줄게. 교회 와 봐. 교회에서 예수님을 보여줄게’ 하지만 결국 내 삶에도 많은 교회 가운데도 예수님의 영성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 솔직한 사실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공연한 불신앙의 걱정 하나를 내려놓고 저자의 다음 말을 듣는다.

‘만약 기독교의 균형 잡힌 영성과 사상의 핵심이 제대로 알려진다면, 나는 많은 사람들의 기독교를 그 대안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영성과 사상의 핵심을 간결하면서도 가장 잘 말해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주기도문>이다’

어려서 내가 배우지 말았으면 좋았을 노래가 하나 있다.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늘 감사합니다. 아멘’ 아마도 말을 막 시작하던 때부터 이 노래를 배웠지 싶다. 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밥알을 입에 넣고 씹는 것 사이의 약간의 시간 차 외에 거의 노래와 밥 먹는 행위는 같이 붙어 있었던 것 같다. 밥을 봤다하면 이 노래를 자동으로 부르고 먹었으니까.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나는 이 노래를 식기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식사를 앞에 놓으면 전혀 기도라는 느낌 없이 고개를 숙이고 이 노래의 가사를 재빠르게 한 번 훑고 나서 식사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때문에 그렇게 될 때까지 아주 정신을 차리고 있던 몇 번 외에는 식탁 앞에서 진실하게 ‘양식을 주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감사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주기도문 역시 마찬가지다. 내게 있어서 주기도문은 어릴 적 매일 저녁마다 텔레비전에서 가장 재미있는 프로를 할 시간에 드려지던 가정예배, 그 가정예배가 끝났음을 알리는 복음 같은 기도문이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시작하면 ‘아~ 끝났다. 예배 끝났다’ 하는 수업 마치는 종소리 같은 신호 그 이상이 아니었다. 어려서 이 기도문 안에 담긴 깊은 영성을 제대로 배웠더라면....이 나이가 되도록 그렇게나 많이도 했던 ‘주의 기도’로 인해서 내 삶과 존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현구 목사님의 <주기도문과 21세기를 위한 영성>을 밤마다 읽으며 지낸 지난 여름, 셀 수도 없을 만큼 외웠던 지난 날 외웠던 주기도문에 진실과 눈물을 담아 다시 올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 편의 설교를 듣고 그 다음 주에 이어질 설교를 기대하는 것처럼 다음 장의 내용을 기대하고 사모하며 읽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하늘로부터 시작한 기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면서 오늘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사는 땅의 일을 구하는 것까지 내려온다. 그렇다. 하늘과 닿지 않는, 영원과 잇대어지지 않는 땅의 일에 대한 해결은 없다. 모든 땅의 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닿아야 하고, 그 하늘의 뜻이 오늘 내가 사는 땅의 일에 다시 잇닿아야 한다. 그리고 결국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그 분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주기도문에 대한 알아듣기 쉬운 설교를 한 편 들었다고 우리의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같이 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이걸 읽고도 어느 예배에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외우고 있었다. 아는 그 순간 내 몸과 행동과 생각이 함께 변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글을 쓰다가 말고 의자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처음 소리를 내서 기도를 시작하자 예배가 끝나는 것 같은 몸에 붙은 타성이 고개를 들었다. 한 번을 외워 기도하고 또 한 번을 소리 내어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고, 다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불렀다. 반복이 될수록 수십 년 타성의 구정물이 빠져나가는 는 순간하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부분을 기도하는 순간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올라온다. ‘개뿔, 내 말과 행동으로 도대체 어떻게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단 말이냐. 교만이 머리까지 닿은 나의 예배하며, 하늘의 뜻과는 무관하게 사는 나의 욕심에 찬 하루하루를 통해서 말이다’ 주의 기도는 회개로 변하고, 눈물로 변했다.

평양부흥 100년을 맞아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올 해였다. 교회가 아니면 어느 영발 있는 선교단체에서 뭔가를 일으켜서 그 바람을 타고 나도 부흥을 경험할 것만 같던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다. 낮아진 기독교인의 자존감으로 상처가 많이 남은 한 해였다. 실컷 욕 먹어 낮아진 자존감 그대로 혼자만의 부흥을 위해서 남은 시간을 보내야지 싶다. 정현구 목사님의 말대로 주기도문이 주는 깊고, 균형 있는 영성 안에 거하는 것이 이 시대에 대안을 제시하는 방법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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